"당신은 없고, 남은 건 쓰잘 것 없어뵈는 막막한 삶뿐"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㉒조민기·이의직의 죽음, 남은 동료들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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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4월17일 일산 기독교 공원 묘지에서 엄수된 고 조민기 동아투위 위원 묘비 제막식. 미망인 홍정선씨와 천관우, 송건호 선생 등 9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유지를 기렸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안종필은 1977년 10월7일 밤 이의직의 임종을 지켰다. 안종필은 이날 오전 이의직의 병세 악화 소식을 듣고 성북구 월곡동으로 달려갔다. 1년 전 폐암 진단을 받은 그는 “가족이나 동아투위 동지들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며 일체의 투약을 거부하며 투병 생활을 해왔다. 이의직은 이날 밤 부인과 어린 삼남매, 안종필 등의 기도와 찬송 속에 마흔일곱에 눈을 감았다.

이의직은 경북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계몽사 등 출판계에서 일하다가 1966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동아일보가 1975년 3월12일 경비 절감을 이유로 심의실, 과학부, 기획부, 출판부를 없애고 이들 부서에 소속된 18명을 하루아침에 해임할 때 이의직도 포함됐다. 그는 출판국 출판부 부장대우로 일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이의직은 이일 저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다 작은 출판사에 주간으로 취직했다. 모아둔 돈이 없었을뿐더러 오히려 적지 않은 빚이 있어 집안 살림은 곤궁했다. 낮에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집에서 번역 일을 했다. 병중에도 이의직은 번역 일을 계속했다. 병이 심해져 출판사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고등학고 1학년 큰아들에게 구술해 원고지를 채웠다.

이의직의 장남인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동아투위가 2013년에 펴낸 <1975-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에서 부친이 영면한 날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혹 아직껏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다 용서하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할 수 있지만, 단 한 사람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하셨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선한 아버지도 도저히 박정희 대통령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 사람도 용서하시라고 간곡히 요청 드리자 아버지는 마침내 박 대통령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자신에게 해를 입힌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가셨다.

2014년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 40주년 기념식에서 고 이의직 동아투위 위원의 장남인 미술평론가 이주헌(사진 맨 오른쪽)씨가 유가족 대표로 소회를 밝히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동아투위가 주관해 치른 장례식에는 유족을 비롯해 동아투위 동료, 재야인사 등 200여명이 문상을 했다. 안종필은 영결사에서 “하룻밤 돌려댄 배신의 칼날으로 130명의 기자를 거리로 내몰아 생도(生途)를 끊던 그 어처구니없는 이승의 사연일랑 악몽으로 잊고 영원히 안식의 잠에 드시라”고 기원했다. 이의직은 동아투위 동료 조민기가 묻힌 경기도 고양군 일산 기독교공원 묘지에 안장됐다.

조민기는 그해 1월19일 서른다섯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동아방송에서 쫓겨난 지 넉 달 만인 1975년 8월 살던 집을 전세 내주고 전세금으로 남가좌동에 외동딸 아라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라네 옷가게’를 열었다. 아내 홍정선씨와 함께 매일 새벽 동대문시장에서 옷을 떼어와 밤늦게까지 가게를 지키다가 그해 12월 신장병을 얻었다. 병실을 찾아온 동료들에게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느라 너무 과로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집과 병원을 오가며 투병한 조민기는 병세 악화로 임종 1주일 전부터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산소호흡을 받으면서도 의식이 뚜렷해 “밥벌이 가지 않고 왜 찾아오느냐”며 자신의 병보다 동료들의 생활을 더 걱정했다.

서울사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조민기는 1967년 1월 동아방송 프로듀서로 입사했다. 그는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현장에 동참했고, 1975년 1월 동아방송에 자유언론실행총회가 결성되었을 때 크게 활약했다. 1975년 3월17일 새벽 농성장에서 강제축출된 후 동아투위 총무간사로 일하다 4월에 무기정직을 당하고, 10월에 해고됐다.

그의 부인 홍정선씨는 1977년 3월 <동아투위 소식>에 ‘당신의 죽음 앞에’라는 글을 통해 “벨소리와 함께 귀가해야 하는 당신도 없고, 사는 게 때때로 노여워서 행패를 부려댈 나의 적수였던 당신도 없고, 남들은 부끄러워 입에 담지 못했다는,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을 새파랗게 젊었던 새댁시절부터 광화문 대로상에서 낭랑히 불러댔던 당신도 없고, 남은 것은 저 쓰잘 것 없어 뵈는 막막한 삶뿐”이라며 비통해했다. 홍정선씨는 그러나 “뜻은 깊었으나 행하지 못했던 당신의 많은 일들을 내 힘 자라는 한 하려고 할 것이며 당신의 자랑스럽고 의연한 동료들은, 조민기 당신 아내를, 이제 동료의 아내에서 동료의 자리로 승격시켜 줄 것”이라며 남편의 못다한 꿈을 이어가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동료들의 가슴을 내리쳤다. 저마다 생활고에 허덕여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그러나 죽음의 슬픔만 하릴없이 붙들 순 없었다. 안종필과 동료들은 두 사람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다시 일어나야 했다.

1977년 10월24일 서울 무교동 태화관에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3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안종필이 동아투위 위원장을 맡고 열린 첫 기념식이었다. 기념식에는 함석헌·천관우·박형규·안병무·정일형 등 각계인사 170여명을 비롯해 250여명이 참석했다. 정동익의 사회로 시작된 기념식은 고 이의직·조민기에 대한 묵념과 애국가 제창, 홍종민의 경과보고, 이해동 목사와 천관우 선생의 격려사, 안종필의 ‘자유언론실천 '77선언’ 낭독 등이 이어졌다. 안종필이 △우리는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제도와 법을 없애라 △현역 언론인들은 언론 본연의 사명인 자유언론을 과감하게 실천하라는 3개 결의 사항이 담긴 ‘77선언’을 낭독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만세삼창으로 기념식을 끝내려고 했을 때 정연주가 일어났다. “오늘 이 모임을 여기서 끝낼 것이 아니라 3년 전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절규하던 그 현장 동아일보사 앞까지 행진하자.” 정연주의 제의에 참석자들은 박수로 채택하고 그 길로 태화관 정문을 나섰다. 참석자들은 광화문 우체국을 거쳐 동아일보사 앞까지 ‘우리 승리하리라’를 합창하면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한 이부영은 1977년 12월27일 출소했다. 기관원들이 이부영을 강제 호송하려고 차에 태워 나오는 모습.

안종필은 12월26일 오전 다시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이부영의 가족과 동행 면회를 한 지 5개월 만이다. 이번엔 동아투위 동료 20여명이 동행했다. 만기출감하는 이부영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다. 만사 제쳐 놓고 나선 이들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았다. 전주에 도착한 안종필 등은 시내 여관에서 1박하고, 이튿날 새벽 5시 전주교도소 정문에 도착했다. 한겨울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출감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부영을 태운 승용차가 나오고 있었다. 기관원들이 이부영을 서울로 데려가려고 했다. 안종필과 동료들은 차를 막아서며 항의했다. 30여분 실랑이를 벌인 끝에 기관원들이 이부영을 내려놨다. 보따리를 품에 안은 이부영은 건강해 보였다. 안종필은 “고생했다”며 이부영을 양팔로 힘껏 안았다. 다른 동료들도 악수하거나 포옹하며 출감을 축하했다. 하얀 입김이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해 연말에 열린 이부영·성유보 기자 출감환영회에서 이부영은 이렇게 말했다.

두 해 반의 세월을 꽉 채우고 무거운 철문은 열렸다. 추운 겨울의 새벽길, 천리를 멀다 않고 철문 앞까지 마중와준 반가운 얼굴들, 고맙고 튼튼한 나의 벗들이었다. 세상 좋아졌다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으나 어찌 아직도 억울한 일, 고통받는 일, 부당한 일들은 어떤 것도 바로 잡혀지지 않은 채 썩은 웅덩이에 물 고여있듯 그대로 남아 있는지, 이제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목청껏 해답을 구할 때인 것 같다. 74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의 지의를 굳힌 이래 우리는 숱한 희생과 고통을 치러왔다. 존경하는 이의직 선배가 타계하셨고 1월19일로 조민기 동지의 1주기를 맞는다. 연행조사, 구류, 벌금, 재판, 징역으로부터 생존권 박탈에 이르기까지 한 그 비장한 길, 그러나 굳은 땅에 물 고인다고 이 시련은 이 시대에 하늘이 우리에게 내리신 축복이었다. 잃을 것이란 목숨밖에 남아 있지 않은 우리는 그저 즐겁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 땅에 거짓 폭력이 말끔히 씻기고 선의와 인간성이 비둘기처럼 내려와 덮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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