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두어 시간 눈을 붙였을 때였다. “김동현! 김동현! 일어나!!” 누군가 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출판국 신동아부 기자 김동현은 잠을 떨치려 애썼다. 동아일보 본관 건물 3층 편집국에서 농성하던 기자들은 밤이면 불침번을 정해 기습에 대비했는데, 김동현의 차례였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창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야 통행금지로 인적이 끊긴 세종로는 무덤처럼 캄캄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밖을 주시하는 김동현의 눈에 불빛과 사람들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웅성웅성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김동현은 몇몇 기자들을 깨웠다. 1975년 3월17일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3시15분쯤 본관 건너편 출판국 건물 쪽에서 탐조등 불빛이 켜지는 것을 신호로 “와, 와”하는 함성과 함께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괴한들이 몰려왔다. “그자들이 왔다! 왔어!” “소화기 준비하고!” “불 다 꺼!”라는 다급한 소리가 편집국 농성장에 퍼졌다. 곧이어 괴한들이 편집국 창문 밖에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창문을 합판으로 막고 2층 공무국으로 내려갔다. 산소 용접기로 철문의 가장자리를 도려내고 해머로 벽을 치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2층 공무국에서는 기자 23명이 5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었다. 고함,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질질 끌려가면서 저항하는 기자들의 비명이 들렸다. 30여분만에 2층 공무국에서 농성하던 기자들은 건물 밖으로 끌려나갔다.
동아일보사 노동조합이 1989년에 펴낸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엔 당시 2층 공무국에서 농성했던 기자의 증언이 실렸다.
“용접기를 이용해 철문을 뜯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농성자들은 전기가 끊겨 어두운데다 만 4일간의 단식으로 탈진상태에 빠져 강제해산에 적극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또 ‘활자판이 무너지면 안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농성장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기자들의 저항이 클 것으로 보았는지 각목을 든 사람도 보였다. 몇몇 기자들이 대항할 태세를 보이기에 내가 앞으로 나서며 “순순히 나갈테니 건드리지 말라”고 외쳤다. 이때 누군가가 “너같은 놈 때문에 우리 회사가 망한다”며 주먹으로 때렸다.”
각목을 휘두르고 술 냄새를 풍기며 2층 공무국에 들어온 괴한들은 동아일보 측이 동원한 사람들이었다. 3·17 강제해산을 지휘한 판매2부장 대우 조종명은 1975년 10월20일 ‘해임 및 무기정직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해고무효소송) 4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회사의 지시에 따라 17일 새벽 3시15분경 경비과 직원, 보급소 총무, 가판구역장, 업무사원 80여명 등 모두 200여명을 데리고 공무국 내 사원구출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사가 동원한 사람들 가운데는 일부 사원 신분이 아닌 사람도 끼어 있었다. 총무국 인사부장 유옥재는 1975년 9월29일 해고무효소송 1심 3차 공판에서 “75년 3월12일부터 17일 사이에 경비직원 14명을 고용한 사실이 있다”면서 “실력으로 신문방송 제작시설을 점거, 정상업무 진행을 방해하고 있어 이를 제거해야 했는데 기존 경비직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이들을 채용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괴한들이 편집국 진입을 시도한 것은 3시50분쯤이었다. 쇠파이프와 각목으로 창문 철망을 부수고 편집국으로 밀고 들어왔다. 기자들은 소화기를 분사하며 저항했지만 금세 빼앗겼다. 대여섯 명의 괴한들이 창문을 넘어왔다. 그들 사이에는 안면 있는 판매부 직원들과 경비원들도 섞여 있었다. 기자들은 스크럼을 짜고 편집국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안종필은 “이들과 싸우지 말라. 우리는 끝까지 비폭력으로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괴한들이 깨진 창문을 통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건장한 몸집의 조종명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괴한들에게 뒤로 물러날 것을 명령하고 기자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신문을 살리기 위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태의 것은 신문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신문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5분 안에 짐을 꾸려 이 건물에서 나가라.”
“마지막으로 정리집회를 하겠다. 자리를 좀 비켜달라.”
현장은 어지러웠고 기자들은 우왕좌왕했다. 안종필은 책상 위에 올라섰다. 50~60명의 농성기자들이 안종필을 주시했다. 간단한 집회가 시작됐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고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다 함께 불렀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회복 만세” “동아일보 만세”를 제창했다. 기자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원고 다발과 옷가지 등 개인 짐을 챙겼다. 양한수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5개월 동안 편집국 사회부 기둥에 걸려 있던 ‘自由言論實踐宣言’ 족자를 떼어냈다.
집회가 끝나자 조종명은 계단 쪽으로 기자들을 안내했다. 기자들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2층 공무국을 지나면서 몇몇 기자들은 흑흑 소리를 내며 울었다. 계단에 서 있던 괴한들 사이에서 욕설이 들렸다. 정문 셔터는 올려져 있었다. 밖은 캄캄했고, 새벽공기는 찼다. 머리 위로 가랑비가 뿌렸다. 쫓겨난 기자들을 함석헌 선생, 천관우 선생, 정일형·이태영 부부, 이희호 여사, 김지하 시인의 모친 정금성 여사 등이 맞이했다.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2004년에 펴낸 ‘1975년 4월9일’에서 19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 편집국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모두 막혀버린 창문 쪽을 바라보며 철제로 된 비상계단을 일사불란하게 오가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칠흑 같은 암흑 속의 침묵이 답답해서 다시 초에 불을 붙였다. 사제복을 입은 서양인을 보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창문 가까이에 있는 촛불로 다가갔다. 그때 갑자기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의 합판이 떨어져 나가면서 유리가 깨지고 순식간에 철망이 뜯겨 나갔다. 소화기를 들고 있던 기자들이 재빨리 침입자들에게 소화기를 틀었지만 금세 빼앗겼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두가 다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시노트 신부는 천주교 인천교구 부주교로 유신헌법 철폐와 구속자 석방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에 격려 광고를 싣는 운동을 벌이면서 기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시노트 신부는 3월16일 저녁 출입을 가로막는 경비원들을 밀치고 편집국 농성장에 합류했다. 그는 편집국 농성장을 지킨 유일한 외부인사였다. 기자들은 그날 밤 ‘비록 폭력에 밀려 쫓겨나더라도 우리는 자유언론을 위해 신명을 바친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시노트 신부에게 맡겼다.
거리로 내몰린 기자들은 비를 피해 정문 아래 앉아서 농성을 벌였다. 아침 6시쯤 중부소방서에서 사복경찰관 120여명이 갑자기 나타나 기자들을 광화문 지하도로 밀어붙였다. 기자들은 광화문 지하도와 비각을 거쳐 청진동까지 밀려났다. 그사이 동아일보 4층 방송국에서 농성을 벌이던 사원들에 대한 강제진압이 시작됐고 아침 6시30분쯤 모두 추방됐다.
그렇게 5박6일 농성은 막을 내렸고, 그날 새벽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 PD, 아나운서 등 130여명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다시는 동아일보에 들어가지 못했다. 통행금지 시간에 공격이 이뤄지고, 2층 공무국 기자들을 태운 차량이 검문도 받지 않고 서울 시내를 질주하고, 사복경찰관 120여명이 갑자기 출현했다는 점에서 3월17일 강제해산은 박정희 정권이 개입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참고자료] ◎ 동아일보사 노동조합,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 1989 ◎ 제임스 시노트, 『1975년 4월9일』, 빛두레,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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