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일주일 새 37명이 잘려나가자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해직사원 37명 복직을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간 지 닷새째인 3월16일 오후, ‘오늘 밤에 강제해산이 있을 것 같다’는 소문이 편집국 농성장 주변에 돌았다. 결혼기념일을 하루 앞둔 정치부 기자 이종대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둘러대고 끊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곧바로 강인섭 정치부 차장과 통화해야 했다.
“강 선배, 동아일보의 앞날을 생각하면 이 정도에서 멈춰야 한다는 거 동의하시죠? 회사가 우리를 쫓아내면 일시적으로 이길지 모르지만 50년 후 동아일보 역사를 어떻게 쓸 겁니까? 강 선배가 경영진에게 이야기를 잘해서 강제축출만은 이해를 시켜 주세요. 나도 동료들에게 얘기할 테니 최악의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막 대화를 해보도록 합시다.”
당시 동아일보사는 제작거부에 맞서 별관 출판국에서 신문제작을 했는데, 강인섭은 제작 참여파였다. 1시간쯤 안 돼 강인섭의 답신이 돌아왔다. “이종대씨, 취지는 좋은데 너무 늦었어요. 이쪽에서 완전히 결심하고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어요. 내 말이 먹혀들 여지는 이미 지나갔어요.” 이종대가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안종필에게 강인섭과의 통화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안종필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6시쯤 회사는 바깥으로 통하는 전화선을 끊고, 보급소 직원과 가두판매원 등 200여명을 별관 주위에 대기시켰다. 동아일보사 정문 셔터는 닫혀 외부와 출입도 통제됐다. 며칠째 철야농성으로 퀭한 얼굴이 역력한 안종필은 뿔테 안경을 벗어 눈언저리를 비비고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일요일 저녁 광화문 네거리는 인적이 드물어 한산했다.
안종필은 송건호 편집국장을 떠올렸다. 송건호는 전날 사장과 주필을 만나 해임사원 전원 복직을 통한 사태 수습을 촉구하며 사표를 냈다. 강제해산 방식으로 사태를 수습하면 먼 20년 후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울면서 간청했으나 두 사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송건호가 편집국 농성장을 찾은 것은 오후 1시30분쯤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편집국을 찾은 송건호는 국장 방으로 안종필과 몇몇 기자들을 불러 “내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어 나는 신문사를 떠난다…”고 했다. 송건호는 끝내 눈물을 보였고, 기자들도 함께 울었다.
비감한 심사에 잠겨있던 안종필의 눈에 권근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오후 늦게 한국기자협회에 농성 상황을 전하러 갔던 권근술은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회사로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안종필은 급히 메모를 휘갈겼다.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 강제해산이 강행될 것 같으니 축출당할 경우에 대비한 성명서를 준비하라.” 안종필은 메모를 적은 종이쪽지를 3층 편집국에서 창밖으로 내려뜨렸다. 권근술은 얼른 그 쪽지를 안주머니에 찔러 넣고 어디론가 잰걸음으로 떠났다. 권근술은 안종필의 부산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와 경남고등학교 4년 후배로 안종필을 각별하게 따르던 사회부 기자였다.
저녁 8시쯤 광고국 부국장 김병관이 편집국으로 찾아왔다. 김상만 사장의 아들인 그는 눈물을 흘리며 농성 해산을 권유했다. 김병관을 지켜본 기자들은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회사의 물리력 동원에 대비해야 했다. 안종필은 편집국 남쪽과 북쪽 출입문을 지킬 불침당번을 확인하고 편집국 안을 돌아봤다. 편집국에 있던 50~60명의 기자들은 닷새째 계속되는 농성으로 다들 기진했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처음 몇 명이 부르던 이 노래는 편집국 안으로 점점 번져나갔다. 찬송가인 이 노래는 편집국 농성장 칠판에 가사가 적혀 있었는데, 기자들은 이 노래와 함께 당시 인권운동 노래로 유명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 운동 가요 ‘뿌리파’를 합창하며 기운을 얻곤 했다. 간혹 부르던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가 그날은 유난히 가슴을 치받았다. 안종필은 가슴 깊이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광화문 동아일보 앞에는 강제해산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민주인사들이 나타났다. 함석헌·천관우 선생,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안충석 신부, 공덕귀·이희호·이태영 여사 등이 동아일보사 3층 편집국과 4층 방송국을 올려보며 농성사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자들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함성을 질렀다. 밤 11시30분, 통행금지 시각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일행은 인근 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편집국 벽시계는 밤 11시30분을 지나 12시로 향하고 있었다. 농성 기자들은 더러 책상 위에 엎드리거나 등받이 의자를 붙여놓고 눕고,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눈을 붙였다. 곯아떨어진 기자도 있고, 추위에 몸을 떨며 뒤척거리는 기자도 있고, 잠이 오지 않는 듯 창가에 서성이는 기자도 있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기자들도 있었다. 안종필은 가죽점퍼 지퍼를 목까지 채우고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생각에 밀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정이 막 지나고, 1975년 3월17일 새벽이 오고 있었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다섯수레, 2014 ◎ 송건호, 『청암 송건호』, 한겨레출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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