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개가 아니고서야 기자들의 목을 칠 수 있나"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②사내 계엄령이 몰고 온 해고, 또 해고

  • 페이스북
  • 트위치
1975년 3월8일 동아일보는 사원 18명 해임을 알리는 방을 붙였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기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제작거부였다. 광고탄압에 따른 경영난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무더기 해임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회사 측의 초강경 대응은 기자들을 벼랑 끝으로 밀었다. 징후는 1975년 2월28일 동아일보 주주총회였다. 동아일보는 주주총회에서 이동욱 등 전투적 이사진으로 개편하고 사내 질서와 기강 확립, 불요불급한 사업과 기구 정비 등을 강조했다. 주총에 이어 열린 이사회에서 김상만 사장이 재선임됐고 주필에 이동욱이 임명됐다.

이동욱은 1971년 2월 국가비상사태선언을 비판한 사설이 실린 뒤 중앙정보부 압력을 받아 퇴임했는데, 3년 3개월만에 주필로 다시 복귀했다. 이동욱 복귀 배경에 대해 2월28일 주주총회에서 사임한 한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주필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김상만 사장과 대학동문이었다. 당시 광고탄압과 같은 큰 짐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회사 내 누구도 주필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 주필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안이 없었다는 얘기다. 천관우씨도 있었으나 천씨는 너무 기자들 쪽에 가깝다는 인상이 있기 때문에 ‘천관우 카드’는 쓸 수 없었다고 본다.”

김상만은 3월1일 사장 중임에 따른 담화문에서 “자기 직분에 태만하거나 남의 직분을 침범하는 일이 무질서를 낳고 결국 자멸의 길로 이끈다”면서 “어려운 때에 동아일보가 살아남는 길은 우선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고 밝혔다. 주필 이동욱도 3월3일 취임사를 통해 사내 질서 문제를 거론하며 “위계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언사나 행동, 무허가 유인물 배포, 회사의 허가 없는 사내집회를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3월5일 인사규정과 복무규정을 개정했다. 기구를 축소할 때나 회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사원을 해임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의 잇단 움직임은 3월8일 사원 18명 전격 해임으로 이어졌다. 동아일보는 그날 오후 3시 경영 악화 이유로 기구를 축소한다면서 심의실과 편집국 기획부, 과학부, 출판부를 없애고 18명을 해임했다. 해임된 18명 가운데는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장 조학래와 총무 양한수, 자유언론실천특위 상임간사 이계익,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적극적이던 기획부 차장 대우 안성열이 포함되었다.

그날은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선거가 치러진 날이었다. 선거는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실시됐고 단독 출마한 권영자 문화부 차장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다. 권영자는 1959년 동아일보 공채 1기로 차장급 가운데 최고참이었고 후배들이나 부장들과의 인간적 관계도 원활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 노조 설립 당시 차장급 기자론 드물게 노조에 가입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여성의 사회 참여와 여성 사원 차별대우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회사가 해임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했지만, 권영자는 기꺼이 분회장을 맡았다.

기협 분회장 선출을 위해 소집된 기자총회는 집단해직 대책 논의로 이어졌다. 총회 분위기는 심각했다. 언제 내가 해임당할지 모른다는 정서가 기자들 사이에 감돌았다. 기자총회가 진행되는 와중에 이동욱이 편집국에 와서 “기구 축소와 사원 해임은 경영난 때문이며, 광고탄압 이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과열돼 있어 광고탄압 이전의 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총회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대량 해직 사태를 알린 동아투위 성명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해임 발표의 방을 찢어버리고 당장 전원이 사표를 내고 제작을 거부하자는 발언도 나왔다. 하지만 대다수는 기자들에 대한 집단해직은 용납할 수 없다면서도 회사에 대한 신뢰를 기본으로 사태를 해결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기자들 스스로 월급을 삭감해 경영난에 대처하겠다며 해임을 거둬달라고 결의하고, 그 뜻이 반영되도록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권영자 등은 총회가 끝난 뒤 이동욱을 면담하고 기자총회 결의를 전달했다. 다음날인 3월9일 이동욱은 기협 분회 집행부와 면담에서 기구 축소와 해임 조치는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 회사 입장이라고 했다.

기자들은 회사가 경비 절감 때문에 기구를 축소했다면 기자들의 합리적인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면담 결과 해직조치를 철회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태는 3월10일 오후 6시 전 기협 분회장 장윤환과 외신부 박지동이 해임되면서 벼랑 끝으로 치달았다. 장윤환은 회사의 허가 없이 유인물을 제작 배포했다는 이유로, 박지동은 기자총회에서 이동욱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 해임 사유였다. 박지동은 기자총회에서 “미친개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유언론에 앞장서 온 기자들의 목을 칠 수 있느냐”고 했지만 누구를 지칭하진 않았다.

기자들에게 장윤환·박지동 해임은 ‘움직이면 목을 자르겠다’는 회사의 분명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들은 회사가 강경 대응을 유도해 자유언론의 싹을 잘라버리려는 것으로 판단했다. 권영자는 3월11일 오전 기협 분회 모임을 갖고 논의를 거듭했지만 대응 방법에 대해선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강경 투쟁을 유도하는 회사 쪽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일단 농성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7시30분쯤 이동욱이 편집국 농성장에 나타나 인사부장을 대기시킨 채 농성을 풀 것을 요구했다.

편집부 기자로 당시 농성장에 있었던 정동익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3월11일 저녁 7시반경 이동욱 주필이 직접 농성장에 나타나 회사 인사부장을 대기시켜 놓은 채 ‘짜른다면 짜르는 거야’라고 하면서 오늘 귀가하지 않은 사람은 즉석에서 해임한다고 위협하며 각부 부장을 통해 농성사원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했다. 이같은 위협 속에 농성기자들은 3월11일 밤 모두 귀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월12일 아침 9시10분 편집국에서 긴급 기자총회가 열렸다. 전날 밤 흉흉한 분위기 속에 귀가한 기자들은 내가 당할 차례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을 안고 자연스럽게 편집국에 모였다. 편집국, 출판국, 동아방송 소속 기자들과 방송국 사원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자유언론실천백서’와 ‘결의문’을 채택하고 부당해임 철회와 이동욱 퇴진을 요구하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안종필 등 부·차장 12명도 동조했다. 이 과정에서 편집국장 송건호가 “자유언론실천도 신문 방송이 안 나가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니 동아일보의 혼란 상태를 좋아할 사람이 누구인가를 곰곰 생각해보라”며 제작거부 결의를 만류하기도 했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기자들은 회사가 일주일 사이 37명을 해임하자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제작거부에 들어간 기자들은 2층 공무국과 3층 편집국, 4층 동아방송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기자들이 취재를 거부하자 회사 측은 농성에 참여하지 않은 소수 인원으로 신문을 제작했다. 주필실, 별관 출판국에서 편집해 인쇄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신아일보를 전전하며 8면이 아닌 4면짜리 신문을 발행했다. 제작거부 농성 첫날인 3월12일 밤 11시쯤 회사 측은 또 해고의 칼을 휘둘렀다. 권영자를 포함해 기협 분회 간부 등 17명을 제작방해 책임을 물어 전격 해임했다. 이로써 3월8일, 10일, 12일 일주일 새 모두 37명이 해임됐다.

해임 철회 제작거부에 사측이 추가 해임으로 맞받으면서 기자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싸우던가, 굴복하던가. 농성장은 좌절감과 두려움이 깔렸지만, 회사 측의 무도함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제작거부를 이끈 간부들이 모두 해임됐기 때문에 새 집행부를 꾸려야 했다. 기자들은 긴급 총회를 열어 기협 분회 임시집행부를 구성했다. 분회장은 안종필이 맡았다. 농성에 합류한 몇 안 되는 차장인 데다 17명 추가 해임의 격앙된 분위기를 가라앉힐 사람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1974년 3월 동아일보 노조가 결성됐을 때,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 때 후배들을 뒤에서 묵묵히 응원하던 그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전임 분회장 권영자는 안종필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안종필은 강직하면서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해임됐으니 후임 분회장도 잘릴 수밖에 없었다. 후배들이 ‘선배 아니면 누가 합니까’하는 권유가 있었지만 누가 그런 선택을 쉽게 하겠나. 후배들도 안종필을 신실하고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편집국 기자들 사이에선 역사를 위해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기협 동아일보 분회 회보인 ‘알림’은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한가지 가슴 뜨겁고 피가 끓는 현상은 임시집행부에 서로 앞다투어 나서는 모습이었다. 칼을 들고 목을 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자진해서 목을 내미는 분회원들의 모습은 바로 순교의 행렬 그것이었습니다. 자유언론이라는 순교!” 안종필과 기자들은 순교의 길을 갔다. 부끄럽지 않은 기사를 쓰겠다는 바람이 오랜 세월 실직과 삶의 굴절, 언론인의 꿈을 앗아갈 줄 그땐 몰랐다.


김성후 선임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