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움직이자 김대중 인터뷰가 실렸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⑯격랑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 페이스북
  • 트위치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은 1974년 10월24일 오전 3층 편집국에서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했다. 홍종민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성원, 홍종민, 장윤환. 맨 오른쪽에 안경을 쓴 안종필의 모습이 보인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4년 10월24일 안종필은 오전 8시30분쯤 출근해서 편집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전날 저녁 송건호 편집국장과 박원근 사회부장, 한우석 지방부장이 서울대 농대생 300여명 시위 관련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데 항의하며 늦은 밤까지 농성한 뒤끝이라 편집국엔 간밤의 흥분이 남아 있었다.

그날은 공휴일인 ‘유엔데이’(UN 창설 기념일)라서 외근 기자들도 출입처에 나가지 않고 편집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쩐지 심상치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9시가 조금 지나자 누군가 유인물을 배포했다. 그리고 편집국 여기저기서 “자, 다들 모입시다!” “사회부 쪽으로 갑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안종필은 편집국 한가운데 사회부장석 쪽으로 향했다. 사회부 양쪽 통로는 편집국 각 부서 기자들과 방송국, 출판국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편집국 중앙기둥에 붓으로 쓴 ‘自由言論實踐宣言-東亞日報社 記者一同’이라는 대형 족자가 내걸려 있었다. 총회에 참석한 기자는 180명이 넘었다. 공휴일 아침이라 그런지 동아일보를 출입하던 기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사히신문 정호상 기자와 AP통신 홍건표 기자가 총회를 지켜보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장윤환이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총회 개회를 선언했다. 사회를 맡은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 보도부장 장성원이 기자총회를 소집한 이유와 경위를 설명했다. 분회 총무를 맡은 홍종민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했다. 장윤환 바로 옆에 서 있던 안종필은 홍종민이 떨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홍종민이 선언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는 동안 안종필은 유인물을 손에 들고 눈으로 따라 읽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떤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하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와 손에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선언

홍종민의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안종필의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총회에 참석한 기자들도 하나 같이 결의에 찬 표정이었다. 장윤환이 기자들을 돌아보며 “선언의 취지에 찬동하면 이 선언문을 기자총회 결의로 채택해달라”고 제의했다. 그러자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문과 결의 내용을 신문과 방송에 보도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성유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날 대회장에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신문에 꼭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이유는 언론자유를 향한 동아일보사의 각오를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동아일보사가 쉽사리 언론의 자유를 배반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기관원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통해 그들이 그동안 한국 언론의 실질적 편집국장, 데스크, 논설위원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권력의 통제와 간섭을 막는 것만이 한국 언론이 진정한 ‘제4부’로서 거듭 태어나는 길임을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0월24일자 동아일보, 이튿날 새벽에 발행
동아일보 분회 집행부는 기자총회 관련 기사와 선언문 전문을 신문 1면에 5단 이상으로, 방송의 경우는 신문 보도에 상응하는 비중으로 보도하기로 결정하고 편집국장 송건호를 통해 기자총회 결의를 경영진에게 전달했다. 송건호는 언론기관의 존재 이유와 동아일보를 아끼는 기자들의 충정을 내세워 경영진에게 기자총회의 건의를 수용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경영진은 “편집국장이 기자들을 컨트롤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하며 기사화를 거부했다. 기자들은 오전 10시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이었다. 1판 신문이 나오는 오후 1시가 되어도 신문이 나오지 않았다. 방송뉴스도 오후 1시부터 중단됐다. 초저녁 즈음 회사 쪽에서 선언문 내용 중 ‘기관원 출입 거부’ 조항만 삭제하자고 제안했다. 기자들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것이 이번 선언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데, 양보할 수 없었다. 대신 선언문 전체를 게재하되 보도 크기를 1면 3단으로 축소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밤 10시40분쯤 회사 쪽은 기자들의 요구를 수락한다고 알려왔다. 기자들은 환호성을 올리고 즉시 신문 제작에 들어갔다. 방송뉴스는 밤 11시 이 사실을 알리는 소식과 함께 정상화됐다. 이렇게 해서 1974년 10월24일자 동아일보는 이튿날인 10월25일 새벽 1시15분쯤에 나왔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했다는 소식을 실은 1974년 10월24일자 동아일보 1면. 기자들은 12시간이 넘는 진통 끝에 이 기사를 1면에 실을 수 있었다. 1974년 10월24일자 동아일보는 이튿날인 10월25일 새벽 1시15분쯤에 나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東亞日報 記者일동/自由言論 실천 宣言’. 이런 제목의 1면 3단 기사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내용과 3개 항 결의내용이 모두 실렸다. 이 기사 옆에 배달지연을 사과하는 내용의 ‘社告(사고)’도 게재했다. 동아일보를 받아든 기자들은 부끄러움과 분노, 좌절이 일시에 걷히는 환희를 느꼈다. 편집국에서는 새벽까지 소주 파티가 벌어졌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삽시간에 전 언론계에 번졌다. 조선일보 기자 150여명은 10월24일 밤 9시20분쯤 편집국에서 모임을 갖고 ‘언론자유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장강재 사장과 김경환 편집국장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일로 이틀째 농성을 벌이고 있던 한국일보 기자 130명도 다음날 새벽 “언론 부재의 현실 앞에서 진실을 전달하는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국민 앞에 부끄럽게 생각해왔다”며 ‘민주언론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행동지침을 채택했다.

김병익이 이끄는 한국기자협회는 10월25일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언론자유 수호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후 며칠 동안 전국 31개 신문, 방송, 통신사 기자들도 일제히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동아일보는 ‘왜 자유언론을 부르짖는가’ 제목의 10월25일자 사설을 통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우리의 사명을 다하려는 책임감의 선언”이라고 다짐했다.

대학가 시위 뉴스가 동아일보에서 나오기 시작했지만 1단 기사에 불과했다. 7면 만화(고바우영감) 옆에 대학생들의 시위를 모아 눈에 띄게 했지만, ‘1단 벽’은 여전히 높았다. 이런 일은 거의 매일 반복되었다. 당시 상황을 박종만은 ‘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자유언론실천재단, 2024)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12시간 넘는 진통 끝에 일선 언론인들의 결의를 독자와 청취자들에게 보도했으나 10월25일자, 10월26일자 신문 지면과 방송보도 역시 기자들의 요구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연히 기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매일 오전 모임을 갖고 그날그날 신문과 방송에 대한 자유언론실천 결의가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는지 분석 평가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여전히 신문제작과 방송보도가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문제기사는 사내 간부들의 자체 검열에 의해 여지없이 평가 절하되거나 송두리째 삭제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전히 신문과 방송 제작을 둘러싸고 회사와 기자들은 갈등을 빚고 있었다.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사건이 11월12일에 있었던 가톨릭 인권회복 기도회 관련 기사의 처리를 둘러싼 줄다리기와 제작 거부 사태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결국 11월12일자 신문이 결간되고, 13일자 사회면에 이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언론실천특위 활동
박종만의 증언대로 동아일보분회는 10월26일 각 부에서 1~2명을 뽑아 30여명 규모로 ‘자유언론실천선언 특별위원회’(실천특위)를 구성했다. 실천특위는 매일 오후 6시 편집국 조사부에서 모임을 갖고 신문과 방송 뉴스를 분석, 평가하고 대책을 논의해 <알림>이라는 기협 동아일보 분회보를 통해 공유했다. 거의 1단으로 취급되는 시국관련 기사를 뉴스 비중에 따라 편집하도록 요구했다.

‘1단 벽’이 무너지는 계기가 있었다. 1974년 11월11일 저녁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최로 서울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10개 교구에서 인권회복 기도회가 열렸다. 13개 도시에서 열린 인권회복 기도회니 당연히 크게 다뤄져야 할 사안이었는데 사회면 2~3단 기사로 보도하려고 했다. 동아일보분회와 실천특위는 사진 포함 최소한 사회면 머리기사 이상으로 다뤄야 한다고 요구했다.

회사는 이 요구를 거부했다. 기자들과 회사는 다시 팽팽하게 맞섰다. 기자들은 11월12일 하루 동안 신문과 방송뉴스의 제작을 거부했다. 동아방송은 이날 정오부터 뉴스 대신 음악을 내보냈다. 11월12일자 동아일보는 발행하지 못했다. 결국 기도회 기사를 11월13일자 사회면에 2단 사진을 맞물려 중간 머리기사로 합의한 뒤에야 신문은 다시 발행됐다.

당시 기협 동아일보 분회장이었던 장윤환은 2016년 펴낸 회고록 ‘글로 남은 한평생’에서 1974년 11월12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11월12일 오후 윤전기가 돌아가지 않는 윤전실 앞을 지나면서 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심한 통증을 느꼈다.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포근하지는 않았지만, 심장 박동처럼 항상 들어왔던 그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아서였다. 이러한 진통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동아일보 지면에는 인권과 민주화운동 등 이른바 시국관련 기사에 대한 ‘1단 벽’이 무너지게 됐다.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기자회견 기사가 1면 머리로 올라가는가 하면, 유신체제 이후 금기로 돼 있던 개헌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사설까지 실렸다. 그 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야당의 개헌투쟁과 민주회복 국민회의 등 민주화운동세력의 움직임을 크게 보도해 나갔다.

장윤환은 1961년 4월 동아일보에 수습기자 3기로 입사했다. 수습기자 생활을 하던 그해 8월 징집영장을 받고 공군장교 시험에 합격해 공군 소위로 2년, 중위로 2년을 복무했다. 1965년 9월 재입사 형식으로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복귀한 그는 1968년 3월에 문화부로 자리를 옮겨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공연예술 쪽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1974년 가을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 집행부를 개편할 때 분회장 후보로 추대됐다. 장윤환은 10월21일 분회장 선거에서 189명의 회원 가운데 167명이 투표에 참여, 144명 찬성으로 분회장에 당선됐다. 동아일보분회장 선거는 투표를 통해 분회장을 뽑은 최초의 선거였다. 그는 분회장 당선 사흘 뒤 자유언론실천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10·24 선언 이후 실천특위 활동에 힘입어 동아일보 지면은 조금씩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작 거부로 ‘1일 휴간’ 등 진통이 있었지만, 사회면에 대학가 시위 기사가 여러 건씩 실렸고 대학가 시위 관련 기사가 간혹 2~3단으로 취급되는 일도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건 12월9일자 1면에 실린 김대중 인터뷰였다. 동아일보는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제목의 연속 인터뷰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만났다. 김대중이 신문에 나온 것은 1973년 10월 마지막 기자회견 이후 처음이었다. 김대중은 1973년 8월8일 도쿄에서 괴한 5~6명에게 납치됐다가 5일 만인 8월13일 밤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난 후 가택연금 상태였다.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동아일보 지면은 눈에 띄는 변화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왼쪽은 1974년 12월9일자 1면에 실린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인터뷰. 오른쪽은 12월10일자 1면에 실린 윤보선 전 대통령 인터뷰.

김대중은 인터뷰에서 “지금 가장 역경에 처해 있지만 실망도 불행도 느끼지 않는 것은 국민에 대한 한없는 신뢰심, 존경심 때문”이라며 “6·25 전시에도 (대통령) 직접선거를 한 국민인데 지금 그런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면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느냐”고 유신정권을 비판했다. 동아일보의 기획 인터뷰는 윤보선·유진오·정구영·백낙준·함석헌·윤제술·장준하·천관우로 이어졌다.

천관우는 자유언론에 참여한 동아일보 기자들을 응원했다. 천관우는 12월23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인터뷰에서 “요즘 같은 신문을 받아본 지가 얼마나 오래됐느냐”며 “이렇게 신문이 나오기까지 언론계 동료들의 결심이나 결심의 이행 과정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안 봐도 눈에 선하다. 언론자유는 언론이 권력에 맞서서 버티고 견디는 데서 얻어진다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는 진실”이라고 했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2014, 다섯수레
◎ 정연주, 『정연주의 기록』, 2011, 유리창
◎ 성유보, 『미완의 꿈-언론인 성유보의 한국현대사』, 2015, 한겨레출판


김성후 선임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