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9월 복학과 함께 시작한 2학기는 대학 생활 마지막 학기였다. 대학 1~3학년을 보내고 군 제대 후 정신을 차리려던 참에 졸업이 다가왔다. 1962년 1월5일 발행된 외대학보 55호는 제5회 졸업식 예고 기사에 237명의 졸업생 명단을 실었는데, 영어과 졸업생 127명 중 안종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졸업식은 1962년 1월19일 동대문구 이문동 한국외대 교정에서 있었다. 오후 2시 졸업생이 입장하면서 시작한 졸업식은 윤보선 대통령을 비롯해 영국·미국·프랑스·독일 대사 등 내빈과 학부형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국기경례, 애국가 봉창, 혁명공약 낭독에 이어 학사보고, 수료증서 수여가 있었다. 최완복 학장은 “모두 어려운 어학을 잘 공부했으니 사회에 나가 역군이 되어 보람 있는 생활이 있기 바란다”며 “어디서나 모교를 기억해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보선 대통령은 “학교에서 배운 옳고 굳건한 이념을 사회에서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축사를 했다. 축사에 이어 재학생과 졸업생의 기념품 증정이 있었고, 교가제창으로 졸업식은 3시쯤 끝났다.
당시 대학을 졸업해도 공채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관공서, 교직, 언론기관, 금융기관 등에 취직한다고 하나 경쟁이 치열했다. 안종필은 1962년 3월25일 부산일보 기자 시험에 도전했다. 시험장 경남중학교에는 수험생들로 북적였다. 시험은 필수 4과목(국어, 논문, 상식, 기사작성)과 선택 1과목(영어, 독어, 불어, 통계학 중에서 택일)이었다. 안종필 등 14명이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5월2일 면접시험을 치르고 전화기를 옆에 두고 며칠을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낙방의 쓴맛은 처참했다. 언론인의 꿈이 산산이 깨어졌다는 게 견딜 수 없었다. 안종필은 초등학교 5학년 일기장에 장래희망은 기자라고 썼을 정도로 언론인을 동경해왔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언론고시’ 시험에 몰두했다. 여러 언론사 기자 시험에 도전했다. 몇 번의 낙방 끝에 안종필은 1963년 2월9일 부산일보에 최종 합격했다.
부산일보에 입사한 과정은 다소 극적인 면이 있었다. 부산일보는 그해 2월5일 견습기자 1차 합격자 20명을 발표하며 ‘작년도 견습기자시험 1차 합격자에게 2차 면접시험 응시자격을 부여한다’고 밝혔다. 1차 시험에 응시하지 않은 안종필은 면접시험만 치러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견습기자 최종합격자를 알린 부산일보 1963년 2월9일자 1면에는 수험번호와 이름을 명기한 다른 합격자와 달리 ‘작년도 1차 합격자 안종필’로 적혀 있다. 정기정, 남훈, 박기태, 박영석, 조정강, 조현규, 김정숙 등이 동기생이다.
안종필은 1963년 2월11일 부산일보로 첫출근했다. 중앙동 4가 36번지에 자리한 부산일보는 보수동 집에서 도보로 간다면 40~50분쯤 거리였다. 당시 부산일보는 시간당 10만부를 찍어내는 서독제 최신형 MAN 고속도윤전기를 도입해 가동에 들어갔고, 지하 1층, 지상 5층 새 사옥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견습기간 6개월이 끝나갈 무렵, 부산일보에서 인사파동이 일어났다. 신임 사장 박준규는 8월 자신이 임명한 주필 겸 편집국장 정만교를 한 달여 만에 해임하고 10월 초 편집부국장, 사회부장에 대해 휴직 명령을 내렸다. 박정희에 대한 부산일보의 비판적 논조 때문으로 추측된다. 부산일보 50년사는 “정만교가 물러난 것은 편집 및 논설에 대한 경영진과의 의견불일치에 원인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박준규는 그해 10월15일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 지원 유세에 앞장섰고, 11월26일 제6대 총선에서 서울 성동구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다.
기자들이 인사조치 백지화를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가자 박준규는 정경부장, 사회부 차장, 보도사진반장을 휴직 발령하고, 정경부 차장 권오현과 기자 배봉수·김종득·신상우, 편집부 기자 김지원을 11월2일자로 해임했다. 기자들은 박 사장의 일방적인 인사조치에 항의하며 영주동 한 여관에서 숙박하며 파업 강도를 높였다. 신문제작이 어려워지자 박준규는 정경부장 등 3명에 대해 휴직명령을 철회하고, 권오현·배봉수·김종득·신상우는 재임명하는 형식으로 복직시켰다. 국회의원에 당선된 박준규는 7개월 남짓 재임하다 1974년 1월 사임했다. 박준규는 훗날 지역구 국회의원 9선에 오르고 13~15대 국회에서 내리 3차례 국회의장을 지냈다.
해임될뻔한 신상우는 안종필과 보수동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부산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에 다닌 두 친구는 서로 다른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마주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신상우는 한 해 전인 1962년 부산일보에 특채로 입사해 정경부 기자를 하고 있었다. 값나는 물건을 훔쳐 남해안 탐험을 모의하던 안종필과 신상우는 20대 중반에 부산일보에서 재회했다.
불알친구들은 부산일보 뒤편 허름한 대폿집에서 막걸리 마시며 아름다운 시절을 추억하지 않았을까. 신상우는 안종필이 신문사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주고, 안종필은 신상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산일보의 이런저런 속사정을 알아갔다. 신상우가 서울에 올라가 박준규에게 인사조치에 항의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안종필은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신상우는 나중에 안종필 입사동기를 배필로 맞이했다. 주월특파원, 국회 출입 기자로 필명을 날린 신상우는 정치권에 뛰어든다. 1971년 8대 총선(부산 동래·양산)에 신민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된 이후 7선(9·10·13·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6개월 견습을 끝낸 안종필은 편집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자진해서 편집부에 간 건지, 회사에서 편집부로 발령냈는지 확실하지 않다. 편집기자는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에 제목을 붙이고 뉴스 밸류를 판단해 레이아웃(신문 지면 설계)을 담당하는 내근기자다. 경찰서 등 현장을 도는 취재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그에게 편집기자가 적성에 더 맞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선배들 밑에서 편집의 기본기를 열심히 익혔다.
이듬해 초 해임의 광풍이 또 불었다. 1964년 1월 부산일보 제7대 사장으로 취임한 최세경은 경영합리화를 내세우며 지방주재기자 6명을 해임하고 이어 편집국 기자 7명을 비롯해 공무·총무·업무국 사원 31명을 무더기 해임했다. 항의와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편집국제2부국장 겸 편집부장 서정태 등 기자 20여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제작거부가 20일 넘게 계속되자 최세경은 3월 말까지 세 차례에 걸쳐 11명에 대한 해임 발령을 취소하는 등 수습책을 냈다.
안종필의 파업 동참 여부에 대해선 기록이나 증언이 없다. 편집부장이 제작을 중단한 상황에서 편집부 졸병인 안종필도 그 영향권에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안애숙은 “오빠가 부산일보에 들어갔을 때 신문사에서 스트라이크 비슷한 게 일어나 아버지가 걱정하시던 게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입사하자마자 두 차례 맞닥뜨린 해임과 파업의 회오리가 10년 후 동아일보에서 다시 몰아칠 줄 꿈에도 몰랐다.
[참고자료]
◎ 외대학보, 1962년 3월18일자 1면
◎ 부산일보사, 『부산일보 50년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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