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9호 폭압에도... 동아일보 앞 6개월 침묵시위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④동아투위 결성, 침묵시위 맨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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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1975년 3월17일 새벽 130여명을 강제로 축출하고 ‘신문 방송 제작을 거부, 방해한 사원은 당분간 출입을 금(禁)함’이라는 방을 붙였다. /자유언론실천재단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사복경찰에 떠밀려 광화문 지하도와 비각을 거쳐 청진동까지 밀려난 안종필은 아침이나 먹자는 동료들 말에 해장국집에 발을 들였다. 입이 깔깔했지만, 선지를 넣고 끓인 해장국을 보니 허기를 느꼈다. 해장국을 한술 뜰수록 화가 치솟았지만 냉정해야 했다. 허기를 채운 안종필은 오전 8시50분쯤 동아일보사 앞으로 갔다. 회사는 정문 철제 셔터를 내리고 입구에 ‘신문 방송 제작을 거부, 방해한 사원은 당분간 출입을 금(禁)함’이라는 방을 붙였다. 출근하는 사원들은 별관 후문을 통해 들어가고 있었다. 파란색이던 사원 신분증은 빨간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19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사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 PD, 아나운서, 엔지니어들은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으로 모였다. 오전 10시 한국기자협회 사무실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폭력에 밀려 동아일보를 떠나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강제해산 전날 저녁, 안종필이 급히 적은 메모를 편집국 창밖으로 내려뜨려 권근술에게 준비하라고 한 그 성명서였다. 한국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안종필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자유언론의 마지막 보루 ‘동아’를 지키기 위해 신명을 바쳐온 우리는 17일 새벽 동아일보 사원 아닌, 산소용접기와 각목을 휘두르는 폭도들에 끌려 밤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뜨거운 국민적 성원과 온 세계 양식의 격려에 힘입어 빈사의 상태에서 기적처럼 회생한 ‘동아’는 이제 권력의 강압과 경영주의 마비된 이성으로 끝내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 비극적 파국 앞에 우리는 국민적 열망을 배반한 괴로움에 비통해할 겨를마저 없다.
이제 ‘동아’는 어제의 ‘동아’가 아니다. 폭력을 서슴지 않는 언론이 어찌 민족의 소리를 대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몸은 비록 ‘동아’의 사옥을 떠나지만 ‘동아’의 정통성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동아’의 정통성을 지닌 우리는 이 참담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 ‘동아’를 되찾아야 할 의무를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처절한 순간에 우리는 ‘10·24 선언’ 그날의 감격을 새삼 되새긴다. 그날 온 국민 앞에 자유언론실천을 다짐했던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자유언론에 순할 것을 다짐한다.
동시에 온 국민과 세계 앞에 참회하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더 우리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면서 권력과 경영주가 역사와 국민의 심판을 두려워할 줄 아는 최후의 이성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자유언론의 대의에 복귀할 것을 촉구해 마지않는다.
인간의 영원한 기본권 자유언론은 산소용접기와 각목으로 말살될 수 없다. ‘동아’의 정통성은 폭도를 고용한 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사수하는 우리들에게 있다.”


폭력적 강제해산 이유에 대해 동아일보는 “일부 과격한 기자들의 제작 방해”라고 틀 지웠다. 동아일보사는 강제해산 당일인 3월17일자 1면에 ‘오늘부터 정상제작’이라는 알림을 내고 1면 하단 광고란에 ‘동아일보사 사원 일동’ 이름으로 ‘국민 여러분께 거듭 아룁니다’라는 글을 실었다.

동아일보사는 이 글에서 “소수 과격분자들의 행위를 묵과하여 비정상적인 제작을 계속함으로써 더 이상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칠 수 없다고 판단, 본사 공무 광고 판매국 사원 2백명이 점거농성 사원을 해산 귀가시켰다”고 주장했다. 또 사원 해임에 대해선 “편집간부와 일부 기자들에 대한 해직조치는 경영합리화를 꾀하고 위계질서를 잡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고 설명했다.

주필 이동욱은 3월18일 외신 기자 50여명과 만나 “작금의 동아 사태는 언론자유와 관련이 없다”고 했다. 기자들 해직과 해임도 “경비절감과 위계질서 확립을 위한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반복했다. 동아일보는 이동욱의 외신 기자회견을 3월19일자 1면 한가운데 사진과 함께 ‘동아의 논조 후퇴없다’는 제목으로 실었다.

제작거부에 참여한 기자들은 “소수 과격분자들”이 아니었다. 한국기자협회가 3월22일자로 발간한 ‘기자협회 회원 여러분께 알리는 소식’에는 3월18일 현재 제작거부 중인 사원 163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당시 한국기자협회는 문공부가 3월10일 ‘기자협회보’를 폐간 조치하자 ‘회원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라는 소식지를 5월3일까지 부정기적으로 냈다). 동아일보는 3월25일자 1면 광고에 제작에 참여하는 기자들 명단을 냈는데, 모두 116명이었다. 동아일보가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힌 116명 중에는 제작거부 기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1975년 3월17일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들은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동아일보 창간 55주년을 맞은 그해 4월1일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 회의실에서 창간 기념식을 별도로 가졌다. 오른쪽부터 고 이계익, 고 안성열, 고 안종필, 권영자 위원장, 고 배동순, 이규만, 고 김창수.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3·17 강제 해산’의 충격은 언론계를 넘어 각계로 번져나갔다. 한국기자협회는 “동아일보의 충격적인 폭력사태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듣는 듯한 절망적인 분노와 슬픔을 억누를 수 없다. 언론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봉쇄하려는 관권과 경영주의 야합이 백일하에 드러났다”는 성명을 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한국기독교학생총연맹,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대표위원회,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등도 성명을 내고 해직기자 복직을 요구했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강경 대응을 계속했다. 3월27일 안종필을 포함해 12명을 추가로 해임하고 7명을 무기정직에 처했다. 4월11일 또다시 75명에 대해 무기정직 처분을 내렸다. 1975년 3월8일 기구축소를 이유로 18명이 해임된 이후 5월1일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49명이 해임되고 84명이 무기정직 처분을 당했다. 무기정직 처분을 당한 사원들은 6개월이 지나도록 동아일보에서 복직명령을 받지 못해 자동해임되었다.

도중에 제작에 참여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 사원도 있었다. ‘동아일보 80년사’에 따르면 모두 48명이다. 동아일보는 3차례에 걸쳐 제작거부 사원들에게 3월31일까지 정상근무에 복귀하라고 권하는 등기우편을 보냈다. 그 결과 36명이 복귀했으며 나머지는 연명으로 근무복귀 의사를 통보해와 전원 무기 정직처분을 내렸다. 이후 12명이 복귀했다.

길거리로 쫓겨난 동아일보 기자들은 3월18일 신문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위원장에는 기협 동아일보 분회장을 맡았다가 해임된 권영자가 선출됐다. 동아투위는 부당해임 철회와 주필 이동욱과 방송국장 이동수 퇴진, 김상만 사장의 사죄를 요구했다.

동아투위는 중앙위원 12명으로 구성된 중앙위원회 아래 부·차장단, 기협 동아일보 분회, 동아방송 자유언론실행총회, 총무·섭외·공보·조직·법무·여성 등 6개 특별위원회를 두었다. 기협 동아일보 분회장인 안종필은 중앙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종로구 청진동 강한빌딩 308호에 임시사무실을 마련하고, 편집국과 출판국은 신문로 세종여관에, 방송국은 한성여관을 집결장소로 정했다.

동아투위는 3월18일부터 6개월간 동아일보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매일 아침 8시30분 사옥 앞에 길게 줄지어 출근하는 동료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면서 인사하고 신문회관까지 행진했다. 경찰,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수사기관원들의 감시 와중에 세종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런 광경은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기자들은 신문회관 3층 복도에서 아침 총회를 갖고 그날그날의 공지사항을 공유하고, 오후에는 동아투위 주장과 활동 상황 등을 담은 유인물을 돌렸다.

“회사 앞 침묵시위가 끝나면 신문회관까지 행진했어요. 행렬의 맨 앞에 안종필 선배가 섰죠. 신문회관 3층 복도에서 아침 총회를 열었는데, 안 선배가 ‘이동욱 주필과 이동수 방송국장은 즉각 물러나라’고 선창하면 우리가 따라 외쳤어요. 집회를 여는 것도, 구호를 외치는 것도 어딘가 어색했어요. 그래도 동지애 같은 묘한 게 우리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어요.” 이종대의 증언이다.

1975년 3월 동아일보 앞 침묵시위를 마친 기자들이 종로5가 기독교회관까지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자유언론실천재단 제공

거리로 내쫓긴 시간이 길어지면서 안종필과 동료들은 신변의 불안과 생계 위협을 맞닥뜨렸다. 특히 국내외 정치 상황은 동아투위 활동에 위협을 가해 왔다. 경찰은 4~5월 권영자 앞으로 시위와 유인물 배포를 중지하라는 경고장을 16차례에 걸쳐 보냈다. 베트남 패망의 회오리 속에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5월13일 선포됐다. 대화를 통해 집단해직 사태를 풀려고 했으나 동아일보사는 응하지 않았다. 법적 대응을 선택해야 했다. 동아투위 소속 121명은 6월21일 동아일보사 대표이사 김상만 상대로 ‘해임 및 무기정직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서울민사지법에 제기했다.


기자들은 종교단체와 민주단체, 언론계 동료들 도움으로 몇 달 동안은 버틸 만했으나 날이 갈수록 생활고에 직면했다. 동아방송 PD로 근무하다가 해고된 허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여덟 식구 중에 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는데 내가 실직을 당했으니 생계가 막연해졌다. 우선 급한 대로 아이들 돌반지부터 팔았다…날마다 시위와 투쟁을 계속한 지 6개월, 빚을 얻어 생활하고 가게 외상도 쌓여갔다. 나처럼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더 이상 아침 도열시위를 하기가 어렵게 되자 각기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동아일보사 앞 침묵시위는 9월17일까지 일요일만 빼고 6개월 동안 이어지다 끝났다. 30~40대의 가장이었던 기자들은 생업을 찾아 나서야 했다. 세종여관 동아투위 사무실은 위원장 권영자와 상근총무를 맡은 박종만이 지켰다. 130여명의 언론인이 직장에서 쫓겨난 1975년 여름이 가고 있었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1975-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2013

◎ 동아일보사, 『민족과 더불어 80년』, 2000

◎ 송건호·최민지·박지동·윤덕한·손석춘 『한국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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