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안종필은 1956년 한국외국어대 영어과에 입학한다. 비록 바라던 대학은 아니었고, 전쟁의 참상이 지워지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서울은 새로운 인생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설렘과 흥분으로 낯설고 물선 광화문과 종로, 명동을 걸으며 저 길 어디쯤 있을 푸른 꿈을 찾아 나아갔다.
안종필은 1956년 4월에 입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외대 학적부에 기재된 안종필의 학번은 ‘195601365’, 56학번이다. 그런데 한국외대 학적부는 안종필의 입학을 1957년 10월1일로 기록하고 있다. 입학 연도에 따라 학번을 부여하는 게 일반적이고 외대가 1957년 10월에 신입생을 뽑지 않아 학적부의 입학 기록은 틀린 것으로 보인다.
안종필이 영어과 신입생이던 1956년 당시 한국외대는 개교 3년째 신설 대학으로 교육시설과 여건은 열악했다. 학교 건물이 없어 종로 2가 영보빌딩과 중구 회현동 5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을 임대해 사용했다. 안종필은 영어과와 교양강좌 수업을 주로 진행한 회현동에서 ‘현대영문강독’ ‘영문학개론’ 등을 수강했다.
안종필은 2학년 2학기를 동대문구 이문동 캠퍼스에서 시작했다. 한국외대는 1957년 9월 동대문구 이문동에 신교사를 준공하고, 1959년 11월 강의실, 교수실, 행정사무실, 휴게실을 등을 갖춘 총 2100평 규모의 본관 건물을 지었다. 이문동 이전 직후 학교 주변은 모두 논밭이었다. 저녁때는 교실 주위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교문은 물론 울타리도 없었고, 교통도 매우 불편해 철둑길을 건너고 논길을 따라 학교까지 통학했다. 그런 환경에서 안종필은 영어를 배우며 공부에 집중했다.
방학이면 안종필은 부산 보수동 집에 내려와 지내곤 했다. 서울에서 구입한 레코드판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거나 흥얼거리던 안종필을 여동생 안애숙은 지금도 기억한다. ‘카타리(Catari), 카타리(Catari)’로 시작하는 ‘무정한 마음(Core Ngrato)’은 안종필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작곡가 살바토레 카르딜로가 작곡했는데 자신을 버리고 떠난 카타리나를 잊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밤이었다. 안애숙은 대학생 큰오빠가 엄마와 나누는 얘기를 잠결에서 들었다. 이튿날 아침 안종필은 안애숙에게 송도해수욕장에 가자고 했다. 안애숙과 한 살 터울의 동생 안미숙도 따라나섰다. 충무동 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중국식 호떡 공갈빵을 몇 개 사서 배를 채우고 버스에 올랐다. 안종필은 송도해수욕장에서 작은 배를 하나 빌려 두 동생을 싣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날따라 안종필은 별말이 없었다. 초등학생인 안애숙이 보기에도 계속 노만 젓는 큰오빠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빠가 말도 없이 노만 계속 젓는 거예요. 배가 깊은 바다로 계속 나아가니 무서워 죽겠는데도 오빠가 너무 심각해서 집에 가자는 말을 못했어요. 뒤에 보니까 오빠가 실연을 겪었더라구요. 엄마 말씀이 전날 밤에 집에 온 오빠가 보수동 집 다락에 숨어 황소울음을 울었다는 거예요.” 안애숙의 회고다. “카타리, 카타리, 왜 너는 그런 쓰디쓴 말을 하느냐?” ‘무정한 마음’의 첫 소절처럼 그 무렵 안종필은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했다.
대학 3학년을 보낸 안종필은 1959년 5월1일 입대한다. 대학 3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군 복무를 어디서 했는지에 대한 행적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병적증명서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안종필이 육군에 입대했고, 병과는 ‘709’였으며 1961년 5월11일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는 사실뿐이다. 전역 사유는 26사단 특별명령(병) 제107호 ‘귀휴 중 전역’이다. 이걸로 미뤄 안종필은 당시 26사단이 있던 경기도 연천에 근무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1959년 입대 당시 복무기간은 33개월이었는데, 대학 재학 중에 입영하면 ‘학보병’이라 하여 복무기간을 1년 반으로 단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종필은 33개월도, 1년 6개월도 아닌 2년 만에 만기 제대했다.
군 생활 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안종필은 입대하고 4개월 만에 휴가를 나왔다. 1959년 9월 무렵이다. 군 생활이 평온하지 않았던지 안종필은 군복을 불태워버리라고 말했다. 당시 안종필의 어머니 우복순은 막내아들 안태균을 출산하고 산후조리하고 있었다. 여동생 안애숙의 회고다. “엄마가 막내를 낳고 얼마 안 돼 큰오빠가 휴가를 나왔나 봐요. 애 낳고 누워 있는 모습을 장성한 큰아들에게 보이기가 민망했나 봐요. 엄마가 아들 보기 부끄럽다는 이야기를 저한테 여러 번 했어요.”
안종필이 4·19 소식을 들은 건 군 복무 중일 때였다.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노골적인 불법·부정 선거를 자행했다. 이에 저항해 마산에서 큰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발포해 8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3·15 마산 의거였다. 며칠 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시체 하나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마산상고 학생으로 3·15 시위 때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4월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김주열은 눈부터 뒤통수까지 최루탄이 박힌 채 주검으로 떠올랐다. 김주열의 참혹한 죽음은 2차 마산 의거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4월19일은 전국이 시위로 용광로가 됐다. 서울에서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중앙대, 한양대, 경희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대학생들과 대광고, 강문고, 동성고, 선린상고 등 학생들, 그리고 시민들이 한데 뭉쳐 국회, 경무대, 대법원, 내무부 등으로 몰려다니며 불법·부정 선거를 규탄했다.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청주 등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경무대로 몰려가던 시위대에 발포를 했고, 수십 명이 죽고 다쳤다. 오후 2시 서울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오후 4시 반에는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인천 등지로 계엄이 확대됐으며, 오후 5시에는 경비계엄이 비상계엄으로 강화됐다. 군병력이 가세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본격적으로 발포를 했다.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광주에서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밤 9시쯤에도 야간 시위가 벌어져 경찰의 총에 9명이 죽고 74명이 다치는 등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로 기록했다.
1960년 4월26일 오전 이승만은 뒷날 ‘하야 선언’으로 불리게 되는 성명을 발표했다. 첫째,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둘째,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했다. 셋째,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했다. 넷째, 이미 합의해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가 그날 오후 이승만 대통령 즉시 하야 등 5개 항목을 담은 시국수습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자 이승만은 4월27일 오전 국회 결의를 존중해서 대통령직을 즉각 물러난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동시에 대통령직 사임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밟고자 대통령직 사임서를 송부했고 국회는 대통령직 사임서를 접수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3대에 걸쳐 12년간의 대통령직에 종지부를 찍었다.
안종필은 1961년 5월11일 만기 제대했다. 군복을 태워버리라고 할 정도로 힘들었던 군 복무를 끝낸 것이다. 위병소를 나올 때 날아갈 것 같던 마음도 며칠 지나자 시들해졌다. 사회에 복귀하자 이런저런 걱정이 밀려왔다. 대학 졸업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앞날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했다. 말년 휴가를 나와 친구들을 만났는데 모두 취직을 걱정했다. 부산 보수동 집에 머물며 복학을 준비하면서도 잠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전역 며칠 만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1961년 5월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 국가의 행정·입법·사법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안종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믿기지 않았다. 아나운서는 혁명 정부의 발표라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당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등의 혁명공약 6개 항목을 계속 읽어댔다.
5·16 쿠데타에 대해 안종필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없다. 당시 대학가 분위기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쿠데타 직후 학생들의 반응은 관망적 자세였다. 쿠데타 직후에 나온 서울대와 고려대 학보의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각각 ‘쿠데타 성공, 학원은 평온, 당연감(當然感) 속에 사태 주시’와 ‘군사혁명에 학생들은 침묵, 무표정, 사태 진전을 주시’였다. 쿠데타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취한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이 3·15부정선거 관련자 엄단, 농어촌 고리채 인하, 부정축재 기업인 연행, 대대적인 깡패소탕 등 부정부패 척결과 사회정화 조치를 단행하면서 국민들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자 대학생들도 쿠데타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안종필은 1961년 가을 한국외대에 복학했다. 그 무렵 나온 외대학보 50호(1961년 9월1일 발행)는 ‘혁명과업 완수와 학생의 임무’라는 사설에서 “긴박한 국운을 정상화시키며 누란의 위기에 걸쳐 있는 국정을 구하기 위한 애국적 궐기에 의한 5·16혁명이 있은지 겨우 백일이 넘는 오늘의 상태를 볼 것 같으면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라며 군사정권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대학가의 이런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군사정권의 개혁 후퇴와 정책 실패, ‘4대 의혹 사건’(워커힐사건, 증권파동,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찡고사건)과 같은 권력욕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참고자료]
◎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외국어대 60년사 1. 시대별 외대사』, 2014
◎ 성유보, 『미완의 꿈』, 한겨레출판, 2015
◎ 동아일보, 1960년 4월27일자 1면, 4월28일자 1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한겨레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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