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시계 훔쳐 남해안 탐험 모의했다 들통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⑤ '안흥목재'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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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안종필(사진 오른쪽)이 동생 안인성, 안애숙과 부산 한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안종필은 1937년 5월5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 사평리 647번지에서 안채열과 우복순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채열은 안종필이 두 살이 되던 1938년 하동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했다. 안채열이 터를 옮긴 부산부 보수정(寶水町·현 중구 보수동)은 보수산에 인접한 마을로 일제 강점기 일본인 밀집 거주지역이었다. 안채열은 보수정 길목에 ‘안흥목재’라는 제재소를 열었다. 수백 평 규모의 넓은 공장 부지에는 원목 더미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었고, 둥근 톱이 뱅글뱅글 돌면서 원목을 켜는 소리로 요란했다. 변변한 제조업 공장이 별로 없던 그 시절 안흥목재는 큰 기업이었다.

안종필은 초등교원 양성을 위해 개교한 부산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에서 1950년까지 공부한다. 배고픈 시절, 안종필이 친구들을 데려오면 안채열은 슬며시 웃었고, 우복순은 먹을 것을 내주었다. 친구들이 기억하는 안종필은 말수가 적고 얌전한 아이였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표를 안 내고 조용히 친구들과 어울렸다. 안종필 집 바로 아래 살았던 친구 김해룡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일화를 똑똑히 기억한다. 하루는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한 교실에서 안종필이 갑자기 교단 위에 올랐다. “여러분! 변명을 하지 맙시다!” 두세 번 큰소리로 외쳤다. 반 아이들 사이에 말 안되는 억지소리가 나오니 듣기가 거북해 참다못해 나선 것이다. 평소 온순하고 조용했던 그가 큰소리로 말해서 기억한다고 김해룡은 회고했다.

안종필은 최병학, 신상우, 홍용우 등과 어울렸다. 대구에서 살다가 2학년 때 중구 부평동으로 이사 온 최병학은 친구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으로 통했다. 최병학은 5학년 여름방학 무렵 안종필 등 네댓 명과 남해안 탐험을 은밀히 모의했다. ‘로빈슨크루소’ ‘15소년 표류기’ 등을 읽은 영향이었다. 대략적인 계획은 이랬다. “남항에서 전마선(배와 배 사이를 다니며 연락을 하거나 짐은 나르는 배)을 얻어 여름방학 때 남해안을 한 바퀴 돌자. 그러려면 돈이 필요한데, 집에서 훔쳐오자. 이 계획을 발설한 사람에겐 바늘을 먹는 벌을 내린다.” 내성적인 안종필이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아버지 몰래 고급시계를 훔쳤다. 신상우는 어머니 반지, 홍용우도 돈 되는 물건을 훔쳤다. 열댓 살 아이들의 순수한 치기는 들통이 났고,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안종필은 1950년 부산제일공업고등학교 중등부에 진학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그해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이승만 정부는 대전에서 대구로, 8월18일 다시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부터 부산은 일시적인 9·28서울수복 직후(1957.10.27.~1951.01.04)를 제외하고 휴전되는 날까지 임시수도가 되었다. 전장에서 떨어진 부산으로 피란민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전쟁 전 약 47만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953년 9월 91만명으로 약 2배가량 늘었다. 피란민들은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한 용두산, 복병산, 대청동, 부도를 배경으로 한 부두 주변,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 영도 바닷가 주변인 태평동, 보수천을 중심으로 한 보수공원과 충무동 해안가 등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그마저 없는 피란민들은 다리 밑에서 생활하거나 움막을 지어 생활해야 했다. 안종필은 학교 가는 길에 보수천 검정다리 아래에서 생활하는 피란민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했다.

넓은 운동장을 가진 학교는 군대나 병원으로 징발됐고, 선생님들도 징병되면서 학교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그 무렵 최병학은 안종필 등에게 아이스케끼 장사를 제안한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큰 사람이 될 수 없다고 꼬드겼다. 안종필은 밤이면 슬며시 집에서 나와 친구들과 함께 아이스케끼를 담은 탄피통을 메고 부산의 번화가인 남포동, 광복동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선생님께 걸려 꽁지 빠지게 달아난 날도 있고, 비가 와서 장사를 공치면 점포 아래 앉아 낄낄거리며 먹어치웠다.

안종필은 17살이 되던 1953년 4월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그해 9월 경남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동래고등학교 학적부는 가정사정으로 퇴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 고교로 익히 알려진 경남고등학교는 대신동 전차 종점을 지나서 구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토성동 학교 건물을 육군 병원으로 내주고 옮겨왔기에 변변한 교실이 없었다. 삼나무 가지에 칠판을 걸어놓고 노천수업을 하다가 판잣집 교실에서 공부했다. 부산·경남지역에서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서울대 입시에서 경남고는 한해 10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안종필보다 2년 후배인 1957년 입학생들의 경우 130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경남고등학교 제10회 졸업앨범 속 안종필.

안종필의 경남고등학교 전학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게 없다. 당시 경남고등학교는 시험을 치러야 입학해야 했다. 경쟁률은 5 대 1이 넘었고, 중학교 때 학급 반장을 지낸 학생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안종필처럼 경남고등학교에는 전학을 오거나 편입학시험을 치러 들어온 학생들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종필 경남고등학교 1년 선배인 김경희는 자신이 입학할 때 정원은 300명이었는데 졸업생은 354명이었고, 편입학 등에 추월영 교장 선생님의 재량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안종필 동급생의 경우 1953년 4월6일 358명이 입학해 1956년 3월25일 353명이 졸업했다. 당시 경남고 입학생 중 경남중 출신이 201명으로 56%를 차지했다.

명문고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강한 학생들에게 전학생은 외부인으로 비쳤을 것이다. 급우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을 하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고 흘끔거렸다. 더러 모자를 툭 치고 달아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안종필도 친구들이 거의 없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모여 있다고 생각하니 주눅이 들었다. 까까머리 고교 시절이 다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며 경계의 눈빛도 시나브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2·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는 동급생들도 여럿 생겼다. 안종필은 학교생활에 점점 적응해갔다. 1학년 때 일곱 번 결석했는데 2학년 때 한 번, 3학년 때 두 번 결석한 것이 전부였다.

교련 시간에 나무총을 갖고 군사훈련을 하다가 기합을 받으며 씩씩거리고, 부채꼴 모양의 원형 교사(校舍) 건축을 시작할 때 학교 뒷산에 올라가 돌멩이를 주워 나르며 투덜거렸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돌을 터파기한 구덩이에 대여섯 번 채우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안종필 등 동급생들은 원형 교사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졸업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 ‘삼손과 데리라’ 등 영화를 단체 관람할 때 키스 장면이 나오면 극장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렀다. 영화가 끝나면 동아극장 뒷골목으로 빠져 계란빵을 사서 나눠 먹었다. 까까머리 고교시절은 그렇게 가고 있었다.

1955년 봄 경주 수학여행

1955년 봄, 3학년 5반 안종필은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 울산역 도착 전 터널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동급생들에게 전설로 내려온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고 있을 때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3학년 5반 담임이던 주상우 선생에게 달려들어 다구리를 놓았다. 기차에 전등이 없어 캄캄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훈육주임 주상우는 ‘구덕산을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학생들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다. 주상우의 주먹에 한 대 맞으면 사나흘은 머리가 띵했다. 평소에 주상우한테 원한을 품었던 말썽꾸러기들이 가세했던 사건이었다. 주상우는 울산역에 도착하자 학생들을 플랫폼에 집합시켰다. 주모자를 찾아 벌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학생들을 질책하며 마지막에 “불문에 부치겠다”고 했다. 그렇게 주상우 선생 다구리 사건은 일단락됐다. 주상우는 훗날 경남고등학교 교장을 거쳐 부산시교육감을 지냈다.

안종필의 성적은 특출하진 않았다. 그의 성적은 1학년 때 전교 350여명 중 253등이었다가 2학년 때 327등으로 떨어졌다. 우수한 학생들이 사이에서 분발했던지 3학년 때 248등으로 올랐다. 2학년 때 40점 만점에 17점을 받았던 영어 강독 점수는 3학년 때 27점, 수학 2항도 10점(2학년)에서 16점(3학년)으로 상승했다. 2·3학년 때 담임을 맡은 선생들은 그가 과학에 흥미를 보인다고 기록했다. 2학년 때 물리 점수는 20점 만점에 8점이었는데, 졸업반 때는 14점을 받았다. 담임 선생님들은 그의 성격은 온순하고 언어는 명료하며 동작은 민첩하다고 평가했다.

3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안종필은 대학 진학을 고민한다. 당시는 3학년 1년 동안 대입 모의고사를 4번 치렀다. 모의고사 결과에 따라 어느 대학에 입학할지 결정하던 시절이었다. 안채열은 장남이 서울대 상대에 들어가기를 원했지만, 안종필의 성적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1956년 3월25일 경남고등학교 제10회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 앨범 인물사진에 안종필은 머리를 빡빡 깎았고 검은색 교복을 입었다. 사진기를 응시하는 안종필은 다부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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