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기자들이 무시한다고 하자... "형님, 내 돕겠습니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⑪경남중고동창회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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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68년 봄, 경남중고 재경동창회 총무로 일하던 김경희가 안종필을 찾아왔다. 김경희는 안종필의 경남고등학교 1년 선배였다. 교사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교통회사에 다니던 김경희는 재경동창회 초대회장 정동식의 권유로 총무를 맡았다. 회원 명부도 변변치 않던 동창회 조직 활성화를 위해 김경희는 동창회보 아이디어를 냈고 정동식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종필은 김경희 부탁을 받고 동창회보 창간 작업에 참여했다. 창간호 제작을 위한 편집회의는 1968년 5월5일 종로구 청진동 재경동창회 사무실에서 열렸다. 정동식과 김경희를 비롯해 조선일보 사회부장 장정호, 신동아부장 손세일,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안철환 등 경남고 출신 언론인들이 주축이었다. 그날 회의에서 월간 발행, 타블로이드 판형 제작, 제호를 ‘경남중고동창회보’로 정하는 등 큰 틀의 동창회보 발행 방향이 정해졌다.

​​1968년 12월18일 종로구 청진동 경남중고동창회 사무실에서 열린 ‘신춘방담’. 안종필이 사회를 본 이 방담 내용은 1969년 1월1일자 ‘경남중고동창회보’에 실렸다.

안종필은 며칠 후 중앙일보 배건섭과 이정배, 서울신문 김종석 등과 편집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김경희가 기사를 도맡아 썼고, 안종필 등이 교대로 편집에 참여했다. 창간호는 1968년 6월1일 나왔다. 안종필은 초창기부터 동창회보 제작에 깊숙이 관여했고, 훗날 동아투위 시절에도 이어졌다. 안종필은 어떻게 동창회보 제작에 참여했을까. 김경희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동창회보 만들려고 경남고 출신 기자들에게 도움을 구했어요. 날 마뜩잖게 생각했던지 도움이 변변치 않았어요. 그래서 종필이한테 연락했습니다.

“종필아, 건방진 기자 놈들이 나를 무시하고 안 나온다. 글은 내가 썼는데, 제목 달고 판도 짜야 하는데 우짜면 좋겠나”라고 하소연하니 종필이가 “형님, 내 돕겠습니다” 하더군요. 그때 나를 많이 도와준 친구가 종필이 아닙니까. 동기 가운데 편집기자로 일하는 이정배, 김종석 등도 종필이가 다 소개해줬어요. 동창회보에 ‘등댓불’이라는 고정란이 있어요. 가십인데, 약간씩 긁어요. 그 아이디어를 종필이가 줬어요. “형, 가십은 맹탕 내려놓으면 안 돼요. 특성이 있어야 해요”라며 조언도 했구요. 고마운 것은 종필이는 한 번도 나한테 결례한 적이 없어요. 절대로 선을 넘지 않았어요. 그거 하나는 철저했죠.

김경희는 안종필과 죽이 맞았다.

“종필아, ‘은사(恩師) 탐방’을 해야 하는데 아는 사람 있나?”
“형님, 선배님 중에 대학교 학장이 있으면 먼저 하면 좋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물상 가르쳤던 김희철 선생이 서울공대 학장으로 있는데 취재하면 되겠네.”
“두 번째는 어디가 좋겠냐?”
“고위 공무원 중에 은사 있을 겁니다.”
“누구야?”
“김학렬 선생이지 뭐꼬.”

고 권근술 한겨레신문 사장이 ‘경남중고동창회보’ 지령 400호를 기념해 실은 2014년 2월25일자에 안종필 기자 추모글. 권근술은 안종필의 경남고등학교 4년 후배로 1975년 3월 안종필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

김학렬은 경남고 영어 교사로 재직하다 1950년 제1회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청와대 경제 제1수석을 거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경희는 김학렬을 만나기 위해 장관실로 불문곡직 찾아갔다. 결재 서류를 들고 줄지어 있는 공무원들 사이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김학렬이 김경희를 불렀다. 그렇게 인터뷰는 성사됐다. 김학렬을 인터뷰하고 돌아왔더니 안종필은 말했다. “형, 참 똥배짱 좋습니다!”

‘慶南中高同窓會報’ 제호는 경남고 은사이자 저명한 서예가인 시암 배길기가 썼다. 배길기가 붓글씨로 쓴 제호는 창간호에만 실리고 2호부터 바뀌었다. 제호가 가늘고 약하게 보였던지 안종필이 제호 디자인을 2호부터 굵은 글씨체로 허락 없이 바꾼 것이다. 분수 넘치는 일을 감행한 것이다. 배길기는 김경희에게 역정을 냈고, 김경희는 안종필에게 이놈 저놈 욕설을 퍼부었다. 그 사건이 있고 안종필은 동창회보 제작에 더 열성을 기울였다. 경남중고동창회보는 안종필이 바꾼 제호 디자인을 그대로 쓰고 있다.

안종필은 그해 12월18일 오후 6시 종로구 청진동 동창회 사무실에서 열린 ‘신춘방담’ 사회를 봤다. 이 방담에는 경남고 1회 졸업생부터 4·5회, 13회 졸업생까지 골고루 참석했다. 1회 졸업생 재경동창회장 정동식을 비롯해 안재흥·임영수(4회), 박봉식(5회), 김영빈(7회), 이규원(8회), 김경희·이윤희(9회), 이정배·김종석·전규삼(10회), 안철환(13회) 등이 참석했다. 쟁쟁한 선배들이 모여 토론하는데, 사회를 맡았으니 동창회보에서 안종필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이 방담은 동창회보 운영자금, 기사 내용 평가와 향후 제작 방향, 동창회보 배포 채널 확대 방안, 편집 애로사항 등이 논의됐다. 안종필은 이야기가 엇나가지 않도록 방담을 이끌면서 뉴스 위주로 동창회보를 만들자는 의견도 피력했다. 이 방담 내용은 1969년 1월1일자 경남중고동창회보 3면에 <‘동문의 광장’에 제언-회보를 말하는 신춘방담>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안종필은 1969년 6월10일자 경남중고동창회보에 글 한 편을 기고했다. 스포츠형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얼굴 사진이 실렸다. 동창회보 창간 1년을 맞아 편집위원 자격으로 쓴 글이다. 편집기자는 이름이 없는 기자로 불린다. 신문에선 취재기자가 전면에 드러나고 편집기자는 뒤편에서 조력자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안종필의 활자화된 글은 의미가 있다.

공자께서 ‘德不孤 必有隣(덕불고 필유인)’이라고 했다. ‘덕’은 고덕하지 않고 반드시 이웃의 벗이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엄연한 진리로 터득했을 때는 역사를 알게 되고, 그 역사 속에 명멸한 숱한 인간상을 알게 된다. 창조의 시련-바로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한 떨기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기까지 토양 속에 박은 무수한 뿌리와 태양과 수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내 줄기를 보관해온 정성의 보람일 것이다.
오는 7월21일 미국에서는 아폴로 11호가 세 우주인을 태우고 달에 착륙을 시도한다. 달에 첫발을 디디는 것은 태고적 인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태초의 신비가 세 우주인이 가지고 올 달의 암석을 분석함으로써 밝혀질지는 모르나, 달 착륙은 1950년대 이후 美蘇(미소)의 치열한 우주 경쟁 속에 수많은 인류의 지적 모험과 땀의 결정임은 분명하다.
동창회보가 발간된 지 벌써 1년, 회보를 거친 동문이 무려 2천명을 헤아리다니 회보 편집을 맡은 한 사람으로 무척 자랑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경고 동문 대가족의 일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화려한 경력(?)으로 지면을 장식해온 동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졸업 후 사회의 응달에서 동창회를 지켜보며, 또는 모교의 발전을 먼빛으로 기도해온 동문도 무수히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회보에 <어디서 무엇을>란을 고정시키고 편집 방향의 최대 역점을 두어 왔다. 그리고 ‘동문찾기운동’을 제창하여 왔으며 지금도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대화는 情(정)의 가교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편지 한 통, 전화 한 통화로 옛정을 다시 새겨 삭막한 사회 생활에 훈김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고 전 동문이 참여하는 대화의 공동 광장을 구축하기 위해 편집이나 취재 방향을 새로운 각도로 다시 반성해야겠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 안종필은 편집위원으로 ‘경남중고동창회보’ 제작에 참여했다. 안종필이 ‘경남중고동창회보’ 창간 1년을 맞아 동창회보 칼럼난 ‘용마춘추’에 쓴 글. 1969년 6월10일자 3면.

안종필은 이 글에서 동창회보가 동문을 연결하는 대화의 광장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동창회보에 화려한 경력의 ‘잘 나가는’ 소수만 등장했음을 지적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건 낮건, 동문이면 누구라도 옛정을 새길 수 있는 동창회보를 만들겠다는 각오도 비쳤다.

초창기부터 동창회보 편집을 도맡았던 안종필은 강제해직 후에도 동창회보 제작을 이어갔다. 그런 인연으로 김경희는 늘 안종필을 챙겼다.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들이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6개월간 벌인 도열시위 현장에 김경희는 있었다. 김경희는 매일 아침 출근길에 일부러 광화문에서 내려 도열 현장을 다녀갔다. 안종필을 비롯해 권근술, 김대은, 이종덕, 강종문 등 경남고 출신 후배들은 김경희를 보곤 꾸벅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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