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67년 5월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116만여 표 차이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4년 전인 1963년 10월15일 치러진 제5대 대선에서 윤보선에 15만여 표 차이로 간신히 승리했던 박정희는 6대 대선에서 압승하자 본격적인 장기 집권 공작에 들어갔다.
첫 번째 목표는 6월8일 제7대 총선에서 공화당이 개헌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제3공화국 헌법 제69조 3항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해 장기 집권을 도모하는 계기로 삼고자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6·8 부정선거’였다.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막걸리와 고무신이 판을 쳤다. 경찰서장과 군수, 구청장이 직접 선거운동에 참여하여 동장과 경찰들에게 현금과 쌀, 밀가루를 나눠주며 살포하도록 독려했다. 현금이 든 동본투를 돌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박정희도 전면에 나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문제 삼자, 국무회의에서 ‘선거법 시행령’을 고쳐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 등 별정직 공무원들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자신도 전국을 돌며 관광도시 개발, 공장 건설, 도로와 교량 건설 등을 약속하며 공화당 후보를 지원했다.
부정선거 결과로 공화당은 1967년 6월8일 치러진 제7대 총선에서 129석(지역구 102석, 전국구 27석)을 휩쓸어 전체 의석의 74%를 장악했다.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선을 훨씬 넘는 의석이었다. 신민당은 45석(지역구 28석, 전국구 17석), 대중당은 1석을 얻었다. 6월9일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신민당은 부정선거 규탄 운동에 들어갔다.
금권과 관권, 폭력이 판을 친 선거가 얼마나 노골적이었던지 동아일보는 선거 결과를 실은 6월9일자 1면 왼쪽 머리의 제목을 ‘사상최악의 부정선거’로 달았다. 부제는 ‘야당 6·8 총선을 규탄’이었다. 기사에는 “신민당이 6·8 총선을 민주반역의 반국시적(反國是的) 사상최악의 불법부정선거”라고 규정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기자에 대한 폭행과 연행, 구속 등 물리적 탄압이 다반사로 진행되고 비판 언론사에 보복을 감행하던 시기에 ‘사상최악의 부정선거’라는 단어를 넣는 것 자체만으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동백림 사건)’을 터뜨렸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 거주하는 동포 예술가, 지식인, 학자, 유학생들이 북한에 입북하거나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도 잠입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동백림 사건으로 194명을 기소했는데, 그중 23명이 간첩죄였다. 통영 출신의 재독 음악가 윤이상과 재불 화가 이응노처럼 세계적인 명성의 예술가들도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렀다. 간첩단 사건으로 정국이 얼어붙으면서 전국이 들끓었던 부정선거 시위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1968년 1월엔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10월엔 ‘울진·삼척 공비사건’ 등이 터지며 남북관계도 극도의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3선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권은 언론을 길들여야 했다. 타깃이 필요했다. 1968년 신동아 12월호에 특집으로 실린 ‘차관(借款)’ 기사는 먹잇감으로 충분했다. 신동아의 ‘차관’ 기사는 원고지 250매 분량의 심층보도였다. 박창래, 김진배 두 기자는 그해 9월 국회에서 ‘외자도입특별국정감사특위’ 활동을 취재하고 국회의원 면담 과정을 거쳐 정부의 차관 도입 실태, 차관의 국내기업 배정 과정, 공화당 및 집권층이 차관 배정 대가로 정치자금을 수수한 정황을 파헤쳤다.
1968년 11월29일 아침 동아일보 편집국 분위기는 여느 날과 달랐다. 편집회의를 마친 부장들 표정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안종필은 ‘그 사건’ 보도를 결심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전 경제부 박창래, 정치부 김진배 두 기자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이틀 넘게 조사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신동아부 부장 손세일을 비롯해 심재호, 이정윤, 정치부 차장 유혁인도 조사를 받았다. 이날은 신동아 주간 홍승면에게 출두를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이날 1면에 5단 제목으로 ‘본사 기자 5명 심문’이라는 컷과 함께 “정보부 신동아지 ‘차관’ 기사 관련/ 보관 원고도 제출케”라는 기사에서 기자가 연행된 사건을 보도했다. 2면에 ‘신동아 필화’라는 제목의 사설도 실었다. 주필 천관우가 쓴 사설은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다루는 것은 부당하며, 적용 법규도 반공법 위반 혐의가 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중앙정보부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민중은 알 권리가 있고 매스컴은 알릴 의무가 있다. 차관으로 자립경제를 내다보게 됐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면, 차관이 부패나 국민 간의 지나친 불균형에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는 논지였다.
1판 신문을 내고 점심 먹고 돌아온 기자들은 말이 없었다. 이 사건의 향배를 놓고 얘기할 법했지만, 엄중한 분위기가 압도했다. 중앙정보부와 정면 대결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포고를 한 셈이니 중앙정보부의 보복은 불 보듯 뻔했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김진배는 이 사건에 대해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50대가 훨씬 넘어 보이는 일제 때 압록강변 어디 수사기관에 있었다는 ‘카이젤 수염’은 말했다. “우리가 당신 기사를 면밀하게 검토했다. 차관 도입에 따른 커미션의 출처며 분배방식이며 권력층의 내막을 아주 정확하게 아는 ‘행세깨나 하는 놈들’이 조직적으로 동아일보에 제공한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 출처만 대면 당신은 죄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어물어물하면 이건 반공법 4조1항에 해당된다.”
그는 배석한 수사관과 나를 번갈아 둘러보며 손바닥으로 책상을 탕 쳤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실직고하지 않고 공산당의 책동에 놀아나 대한민국 정부를 농락하고…. 이놈 다른 방으로 끌고 가!”
“너 6·25 때 총 들고 의용군 했지? 여기 경찰보고 갖고 있다.”
“사실이다. 총 들었다. 수류탄도, M1도, 칼빈도, 박격포도! 전투경찰로 싸웠다.”
그것은 약과다.
“네 애비는 남로당 세포고, 3·22폭동(1947년) 때 인민위원장 한 거 우리가 다 알고 있어. 이런 자이기 때문에 이런 터무니없는 대한민국에 해가 되는 기사를 써서 민심을 혼란시키고….”
나는 그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님은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열두 살 때, 국민학교 5학년 때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 새끼가 덤벼? 이런 빨갱이 새끼가!”
순간 내 눈엔 보이는 게 없었다. 옆에 놓인 걸상을 번쩍 들어 책상 위에 던지며 소리쳤다.
“이런 개 같은 새끼! 너 이 새끼, 6·25 때 뭐 해먹은 놈이야! 네 애비는 뭐 해먹었어! 보이는 게 없나, 이 새끼가! 내 열여덟에 총 들고 싸웠다. 그때 죽었을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 이놈의 새끼, 너 같은 건 내가 죽여!”
정말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옆에 한 놈이 있든, 열 놈이 있든 그런 건 쥐새끼로 보였다. 그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손도 들지 못했다. 나는 그들 한두 놈쯤은 정말 죽일 듯이 살기가 돋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다시는 “빨갱이다”, “공산당이다”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된 기사 대부분이 국회가 이미 조사하고 논의한 내용으로 허위도 왜곡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앙정보부는 차관 기사로 혐의를 잡기 어렵게 되자 두 달 전 신동아에 실린 번역문을 트집 잡았다. 신동아는 10월호에 미국 미주리대 교수 조순승이 그해 3월 아시아학회 총회에서 발표한 ‘북괴와 중소분열’이라는 논문을 번역해 실었다.
중앙정보부는 “1945년에 남만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 김일성과 그의 추종자들은 소련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훈련받은 한국인들과 함께 소련 점령군을 따라 북한에 들어왔다”는 구절이 반공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영어 원문을 번역하면서 김일성을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communist guerrilla leader)’라고 했는데, 중앙정보부의 지적을 받고 11월호에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라고 번역한 것은 공비 두목의 오역이었다”라는 정정기사를 실어 일단락된 사안이었다.
중앙정보부는 12월2일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북괴와 중소분열’ 영문 원고 번역문, 신동아 월요회의 회의록, 송고장(送稿帳), 서신, 영수증 등 12점을 압수했다. 이튿날 동아일보 발행인 겸 부사장 김상만, 주필 천관우를 연행해 조사하고, 사흘 뒤 홍승면과 손세일을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동아를 자진 폐간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동아일보가 12월7일자 1면에 ‘영어 원문 중 일부 오역으로 사과의 뜻을 전한다’는 사과문을 게재하자 홍승면과 손세일을 석방했다. 동아일보는 12월11일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을 자진사퇴 형식으로 해임하고 1면에 ‘본사사령’으로 알렸다. 김상만은 발행인 자리를 내놓았다.
뒷날 손세일은 동아일보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한 배경에는 동아일보 계열사인 삼양사와 경방(주)에 대한 세무조사 압력을 우려하는 동시에 동아일보 전 직원에 대한 병역 조사 실시 등 전 방위적 압박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도 ‘김형욱 회고록’에서 김성곤 당시 공화당 재정위원장이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신동아의 차관기사를 중앙정보부에서 조사하도록 사주했다고 증언했다.
기자 2명이 구속되고 동아일보 발행인과 주필 등 12명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간 사건을 주요 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신문편집인협회장 최석채는 12월21일 회장직에서 사퇴하며 기자협회보와 한 인터뷰에서 “신문은 편집인과 기자의 손에서 떠났다”고 토로했다. 최석채는 “신동아 사건은 한 사의 주필과 편집국장급 인사가 3명이나 순수한 자의가 아닌 사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언론계에 커다란 상처가 아닐 수 없다”며 “한국의 언론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이상으로 경영주의 손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노조의 결성과 신문사의 주식을 사원들이 갖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주필에서 축출된 천관우는 1969년 1월10일자 기자협회보에 ‘신년유감’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신동아 사태를 외면하고 침묵한 언론계 행태를 ‘연탄가스 중독’에 비유했다. 그는 연탄가스가 한국 언론에 스며든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며 “신문이 자유보다 자율을 외치고 신문이 항쟁정신보다 협조정신을 외치면서부터 가스는 스며들기 시작했다”고 탄식했다. 천관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죽지 않으며 또 죽을 수도 없다. 언론이 죽지 않는다는 피닉스가 되는 것은 바로 언론인 자신들의 단결된 힘에 있다”며 언론인들의 단결을 촉구했다.
[참고자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성유보, 『미완의 꿈-언론인 성유보의 한국 현대사』, 한겨레출판, 2015
◎ 동아일보사, 『민족과 더불어 80년-동아일보 1920~2000』, 2000
◎ 김진배, 『관훈저널』, 2008년 봄호. '1968년 그해 영광과 곤욕; JP 특종, 차관필화(借款筆禍)'
◎ 국가정보원,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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