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 골며 자는 척하던 편집국장, 벌떡 일어나 소리치더니...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⑨'말발이 센' 동아일보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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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66년 11월 안종필 이직 전후로 동아일보 편집부 진용은 일신하게 된다. 편집부장 김준철 아래 권도홍이 차장으로 앉고 이대훈·박중길·한갑수가 수석기자, 최성두·안종필·천상기가 포진했다. 아래로 안성열, 장동만, 최재욱, 유경현, 김욱한, 이시헌, 민병문, 조강환, 이현락 등 동아일보 공채출신들이 참여했다. 동아일보는 견습기자를 선발하면 편집부에 2~3명씩 배치했다.

당시 동아일보 공채출신 기자들은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라는 별도 모임이 있었다. 입사하면 견습기자 출신 선배들이 따로 불러 악타 디우르나 회원이 된 것을 환영한다며 반겼다. 악타는 기원전 59년쯤 로마제국 원로원에서 발행한 신문 비슷한 일종의 관보를 뜻한다. 공채출신 편집부 기자들은 기회가 닿으면 취재부서로 빠져나갔다. 편집부는 다른 언론사에서 경력으로 들어온 ‘외래파’들이 지킬 수밖에 없었다.

1975년 동아일보사 2층 공무국. 사람들 좌우로 활자판이 보인다.

안종필은 아침 9시쯤 출근해서 원고지에 작성된 기사가 넘어오면 편집에 들어갔다. 기사가 마감시간을 넘겨 출고되기 마련이라 매일 시간에 쫓기는 건 편집기자의 숙명이었다. 안종필은 정신을 집중해 신속히 제목을 달고 사진을 넣고, 뉴스 가치에 맞게 기사를 배치한 지면 설계도를 들고 2층 공무국으로 내려갔다. 기름때 천지에 온통 납 냄새뿐인 공무국에는 활자가 배열된 활자판이 진열되어 있었다. 안종필은 정판공들이 손으로 활자를 일일이 뽑아 판을 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기사 누락 등 조판 과정에서 실수가 없는지를 점검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것은 편집자 책임이기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8면짜리 석간신문으로 하루에 4번 찍었다. 대개 12시쯤 1판 신문이 나왔다. 신문팔이 소년들이 “동아일보!”라고 외치며 길거리에서 팔거나 경기, 강원, 제주, 충청 일부 지역에 배달되는 신문이었다. 편집기자들은 오후엔 새로운 기사를 반영해 2판(서울지역 가정에 배달되는 신문)을 제작하고 더러 기획면을 편집했다. 오후 당번인 편집기자들은 지면 전체를 개판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오후 6~7시까지 남아서 3·4판(영호남 지역에 배달되는 신문)을 제작했다. 3·4판 신문은 밤에 운송해 이튿날 아침 배달됐다.

동아일보 편집국은 시끄럽기는 하되 활기가 넘쳤다. 언론사 선후배 사이는 군대의 위계질서와 비슷해서 엄격했다. 기자들 사이에 몇 달만 입사가 빨라도 선배로 호칭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선후배를 가리지 않고 보도 내용이나 제작 방향 등에 목소리를 냈고, 후배라고 해서 기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동아일보 기자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지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특히 4·19 혁명을 전후해서 대학을 다닌 기자들은 정의와 자유에 남달랐다.

기자들은 부장, 국장이나 사장에게 절대로 ‘님’자를 붙이지 않았다. 근무 중에 사장이 나 누가 오더라도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사장이 질문하면 앉아서 답했다. 1968년 봄날이었다. 약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김상만 부사장이 편집국에 들어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중앙 통로를 거쳐 편집국장석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구도 동아일보의 실질적 사주인 그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인사는커녕 일어서지 않고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거나 비스듬히 누워 흘낏 한 번 돌아보고 하던 일을 계속하거나 시시덕거리며 잡담할 뿐이었다.

편집부는 내근부서이지만 시쳇말로 ‘말발이 센’ 부서였다. 편집부 기자들은 1판이 나오면 오탈자가 없는지, 지면 구성에 문제가 없는지 훑어보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점심에 반주를 곁들이고 회사에 들어와 그날 1판 신문 품평회를 했다. 다른 신문이 다룬 것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중요 사안인데 지면에 작게 담지 않았는지, 제목이 기사 핵심을 비껴가지 않았는지 등을 얘기했다.

어느 날 오후 편집부 입길에 올랐던 보도는 코카콜라 기사였다. 기사 가치에 비해 작게 다뤄졌고, 편집국 상층부가 봐줬다는 투의 얘기가 오갔다. 갑자기 편집부 바로 뒤쪽에 있는 편집국장석에서 흥분한 소리가 들렸다. “K○○씨! 나 코카콜라에서 한 푼도 받아먹은 것 없어요!” 코를 골며 잠자는 척하고 있던 편집국장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다. 이러쿵저러쿵 찧고 까불던 기자들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누가 불려가 질책을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은 그랬다.

뒷날 이런 일화도 있다. 유독 껌을 잘 씹는 기자가 있었다. 부장이든 국장이든 누구 앞에서든 껌을 질겅질겅 씹고 다녔다. 짝짝 씹는 소리가 좀 거슬렸지만 다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편집국에서 껌 씹지 말라는 편집국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황당했던지 안종필이 편집부원들 다 들으라며 큰소리로 사환에게 말했다. “야, ○○야! 껌 10통만 사 와라!!” 안종필은 사환이 가져온 껌을 1통씩 편집부원들에 나눠주며 말했다. “씹어라!” 당시 편집부에 근무한 박종만은 “평소 온화한 안종필 선배가 껌을 나눠 주며 씹으라는 것은 말 안되는 얘기는 하지 말라고 국장에게 치받은 것”이라고 평했다.

동아일보 편집국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언론을 길들이려는 박정희 정권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언론사에는 ‘기관원’으로 불리는 사람들의 편집국 출입이 잦아졌다. 언론사에 대한 정보기관 사찰의 시작이었다. 중앙정보부, 보안사, 치안국 요원들은 언론사에 출근하면서 수시로 기사를 넣거나 빼달라며 청탁을 하거나 압력을 가하고, 서슴없이 협박했다. 돈으로 유혹하는 경우도 있었다. 권도홍은 2010년에 펴낸 자서전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동아일보사 전경.

어느 날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을 자칭하는 어떤 사내로부터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당신을 부수려고 들면 간단하다. 지나치게 굴지 말라”고 했다. 되받았다. “부수고 안 부수고는 당신들 뜻대로다. 부술 만하거든 부서라.” 전화는 끊겼다. 부수기 위한 후속조처는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다. 전번과는 목소리가 달랐다. 무교동, 지금은 자취도 없는 ‘1번지’라는 맥주집 이웃의 다방에 갔더니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중년의 남자가 좌우에 건장한 사내 두 사람을 거느리고 앉아 있었다. 불문곡직하고 잘 봐달라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두툼한 항공봉투를 내밀었다. 뭐냐는 물음에 그는 극장표라고 했다. 그러나 그자리에서 열어본 봉투 속에는 수십 장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나는 바로 그 사람 앞의 테이블에 봉투를 던지고 되돌아 나왔다.

권도홍은 사장 청탁이라도 칼 같이 자르고, 중정 압력에 굴하지 않기로 명성이 자자한 편집기자였다. 안종필 등 편집부 젊은 기자들은 권도홍을 존경하고 따랐다. 권도홍은 1955년 부산일보 기자로 시작해 국제신문, 한국일보, 민국일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20년 편집기자로 일했다. 부산 동아대학교 1학년 중퇴가 학력 전부였지만 두뇌가 명석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춘 편집의 귀재였다. 특히 제목 잘 달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1975년 3월 동아일보 제작거부 농성에 참여하다 해임됐다. 부장급으로 유일한 해직자였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 언론에 대한 폭력적 보복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비판 기사를 쓴 기자들은 늦은 밤이나 새벽 괴한들에게 끌려가 폭행을 당하고 ‘펜대 조심하라. 너의 생명을 노린다’는 협박장까지 받았다. 테러를 통해 공포감을 심어주고 기자들의 입을 막아버리겠다는 속셈이었다. 언론계에 대한 박 정권의 치명적 공격이 점점 도래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 권도홍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권도홍 편집기자 자전』 나남, 2010

◎ 조강환 『뜻이 있어 길이 있어 조강환 살아온 날들』 나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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