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69년 5월5일은 안종필의 서른세 번째 생일이었다. 생일상에 오른 미역국을 뜨자 행복감이 시나브로 밀려왔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지만 그걸로 살림을 꾸려 가는 이광자가 믿음직스러웠고 네 살배기 민영은 무럭무럭 크고 있었다. 동아일보 편집부에서도 중견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9월이면 새 식구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이광자는 딸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이름을 짓기 위해 틈나는 대로 옥편을 뒤적이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안종필이 어느 날 ‘예림’이 어떤지 묻자 이광자는 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안종필은 가끔 이광자를 광화문으로 불러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며 다방에서 커피도 마셨다. 아래로 남동생만 다섯이라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자란 이광자는 여자를 먼저 배려하는 안종필의 마음 씀씀이가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더러 싸울 때도 있었다. 대판 싸운 것은 한해 전 가을 무렵이었다. 셋방살이를 끝내고 싶은 이광자는 작은집이라도 내 집을 마련하고 싶었다. 화곡동에 괜찮은 집이 나왔다는 소개를 받고 안종필 몰래 계약을 했다. 당시 국군의날은 휴일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와 차 한 잔 마시면서 이광자가 집 이야기를 꺼냈다. 안종필은 새집으로 이사할 여력이 안 된다며 반대했다. 일단 집이라도 보고 와서 생각하자는 이광자의 말에 안종필은 마뜩잖아했다.
영등포구 화곡동에 나왔다는 집을 보러 갔다. 양옥에 남향이라 집이 밝고 환해 좋았다. 그런데 안종필은 별말이 없었다. 그날 밤, 심한 말다툼이 오고 갔다. 안종필은 무슨 돈이 있어 계약했냐며 화냈고, 이광자는 직장 다니며 모은 돈도 있고, 이래저래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며칠을 몰아쳤다. 어떤 남편이 아내를 이길 수 있을까. 결국 이광자의 뜻에 안종필은 따랐다. 안종필 부부는 그해 가을, 영등포구 화곡동 105번지로 이사했다.
이사 과정에 불화가 있었지만 안종필은 이 무렵 활기로 가득찼다. 서울 생활 4년 만에 서울 외곽이지만 가족이 기다리는 집을 마련했고, 어린 시절 꿈이었던 동아일보 기자가 돼 있었다. 경남중고동창회보 편집위원을 하며 당당한 경남고 일원이라는 자부심도 생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들 민영에 이어 딸 예림을 맞을 준비에 부풀었다.
딸이 태어나기 며칠 전, 1969년 9월13일이었다. 신문 발행이 끝났지만 안종필은 회사에 남아야 했다. 그날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박정희에게 3선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3선개헌안을 표결하려고 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3연임을 금지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면 3선 출마가 가능하도록 헌법 개정이 이뤄져야 했다.
여당의 표결 강행을 막기 위해 야당은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공화당이 심야에 3선개헌안을 강행 처리할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동아일보는 호외 발행을 준비했다. 안종필 등 편집부 호외팀은 설렁탕으로 저녁을 때우고 회사로 복귀했다.
편집부장 대리 권도홍이 편집부 호외팀을 소집했다. “표결 결과를 기다리지 말고, 본회의장에 가보자.”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을 볼 수 있다면 더욱 생생한 편집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게 권도홍의 생각이었다.
그날 밤 8시쯤, 태평로 국회 본회의장 2층 방청석에 권도홍을 비롯해 안종필, 신양휴, 최재욱이 나란히 앉았다. 방청석은 투개표 광경을 중계하려는 방송사 카메라와 보도진, 방청인들로 빽빽했다. 신민회 원내총무 김영삼이 동료 의원들과 귀엣말을 나누는 모습이 안종필 눈에 들어왔다. 본회의가 밤 10시쯤 속개된다는 얘기가 들렸으나 자정이 넘도록 열리지 않았다.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석 주변에 담요와 이불을 깔고 철야농성의 태세를 취했다. 국회의장 이효상은 의장실을 나와 공관으로 간다고 밝히면서 “자정이 넘었기 때문에 본회의가 자동휴회됐다”고 말했다. 의사국장 권효섭도 “본회의 사전결의 없이 일요일에 회의를 못 연다”고 했다. 3선개헌안 통과를 강행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방송사 카메라도 철수했다. 동아일보 편집부 호외팀도 회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큰 착각이었다. 공화당은 9월14일 새벽 2시50분께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국회 본회의를 열어 3선개헌안을 전격적으로 처리했다. 개헌안이 벼락치기로 통과됐다는 소식에 동아일보 편집부 호외팀은 제3별관으로 냅다 뛰었다. 제3별관은 국회의사당 건너편 서울신문사 뒤쪽에 있었다. 3별관 후문과 정문 앞은 난리가 아니었다. 깜깜한 골목길에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이를 막으려는 사복 경찰들이 사진기자들을 밀치고 카메라를 낚아채고 있었다. 그때 동아일보 사진부 기자 송호창이 “이 새끼가 사람친다”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공화당 원내총무 오치성을 호위해 가던 청년 2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플래시를 터뜨리는 송호창을 두들겨 팼다.
공화당 의원들은 별관 후문으로 하나둘 빠져나갔다.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피해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개헌안 처리 소식을 듣고 별관으로 뛰어왔던 야당 의원 김상현은 꽁무니를 빼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나 김상현이다. 이 강도들아, 강도들!”하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는 3층 특별회의실에 뛰어들어 투표함과 명패함을 바닥에 내던지며 울부짖었다. 3선개헌안은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3별관에서, 야당을 감쪽같이 속인 여당이 새벽에 본회의를 열어 5분 만에 변칙적 방법으로 처리됐다.
야음을 틈탄 기습 표결 현장을 목격한 동아일보 편집부 호외팀은 빠른 걸음으로 회사로 돌아왔다. 호외를 만들 차례였다. 호외 편집을 맡은 안종필은 3층 편집부 자리에 앉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기사가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정치부장 유혁인 지시에 따라 이진희가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권도홍이 정치부를 향해 “통과라는 말 대신 처리, 변칙처리로 합시다”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편집부로 넘어온 기사에는 이진희가 쓴 ‘변칙처리’의 ‘처리’를 유혁인이 지우고 ‘통과’로 고쳐 ‘변칙통과’로 되어 있었다.
기사를 본 권도홍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 부장, 기사를 왜 고치는 거요, 변칙처리로 합시다.” 유혁인은 어이가 없는지 맞고함을 쳤다. “마음대로 해요.” 편집부장 대리가 정치부장에게 지시하듯 큰소리를 치자 편집국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권도홍은 개의치 않는 듯 ‘통과’를 ‘처리’로 고쳐 안종필에게 넘겼다. 안종필은 신문지 반절 짜리 호외를 가로지르는 큰 컷으로 ‘개헌안 공화 단독 변칙처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현장 목격자로서 안종필에게 ‘통과’라는 표현은 용납할 수 없었다. ‘변칙처리’를 어마어마하게 큰 제목으로 편집한 이유였다.
‘변칙처리’ 제목은 동아일보만의 것이었다. 9월14일에 발행한 호외를 다시 실은 9월15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개헌안 공화 전격 변칙처리’로 나갔다. ‘단독’이 ‘전격’으로 바뀌었을 뿐 ‘변칙처리’는 그대로였다. 동아일보를 제외한 다른 신문은 ‘가결’이나 ‘통과’로 처리했다. 9월14일자 조선일보는 ‘개헌안 122표로 가결’, 한국일보는 ‘3선개헌안 전격통과’로 표현했다. 9월15일자 경향신문은 ‘3선 개헌안 전격통과’, 매일경제는 ‘3선개헌안 기습통과’로 제목이 달렸다.
권도홍은 훗날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호외를 발행한 같은 날 9월14일 석간 첫판을 편집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이 나타났다. 그는 내 곁에 앉더니 ‘변칙처리’를 ‘변칙통과’로 한 번만 봐달라고 했다…김이 다녀간 뒤 호외를 재록한 첫판 작업에 들어가자 사장실에서 전갈이 왔다. ‘변칙처리’를 ‘변칙통과’로 고치라는 지시였다. 나는 안 된다고 버텼다. 그것은 사장 지시가 아니라 정보부 지시가 아닌가? 사장 지시를 거부한 것은 편집부의 총의였다. 점잖되 다혈질인 이현락 기자도 구둣발로 책상을 걷어차며 편집을 거부하자고 소리치는 판이니 점잖기로 말하면 부처님 같은 홍승면 국장이 무슨 말을 할까? 사장 지시에도 불구하고 석간 시내판까지 자구 수정 없이 호외 재록으로 나갔다.”
동아일보 9월15일자 사회면 머리기사 제목은 ‘그럴수가…’였다. 3선개헌안이 변칙처리됐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 반응을 다룬 기사로 당시 상황을 네 글자 제목으로 압축했다. 특히 글자 안에 표결할 때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부표(否票) ‘xxxx’를 넣은 특이한 레이아웃이었다.
그간 안종필을 소개한 몇몇 글에는 ‘그럴수가…’를 안종필이 편집했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당시 동아일보 사회면을 편집하던 최성두의 작품이다. 최성두는 “‘그럴수가’라는 제목이 퍼뜩 생각나 그렇게 달았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인위적으로 글자 안에 부호 ‘x’를 집어넣었다. 한국기자상도 받았다”고 증언했다.
최성두는 이 편집으로 1970년 제4회 한국기자상(편집부문)을 받았다. 당시 한국기자상 심사위원장 이관구는 심사평에서 “여단 단독 처리로 된 헌법 개정안의 변칙 통과 기사를 편집함에 있어서 ‘그럴수가’라는 삼단 횡조 컷 밑에 통과 요일인 휴일 아침 시민의 침통한 표정을 ‘해도 너무 심했다’는 종 4단의 짤막한 제목으로 과장 없이 적절하게 표현한 수법은 과연 큰 호소력을 가진 제목이다. 그리고 ‘그럴수가’라는 제목 자의 속에는 xxx라는 부정의 암시를 한 것도 이색적이었다. 어쨌든 당시의 비상한 분위기 속에서 할 말을 다 한 대담한 표현의 제목이었다”고 했다.
‘변칙처리’ 제목에 대한 일화는 여동생 안애숙의 기억에도 선하다. 안애숙은 당시 대학을 다니면서 안종필 집에 살고 있었다. 안종필은 3선 개헌안 처리 기사를 실은 여러 신문을 거실에 펼쳐 놓고 여동생을 불렀다.
“니, 여기 신문들 제목이 어떻게 다른지 한번 봐라. 이 신문하고 저 신문하고 어떻게 다른지?”
“오빠, 나는 정확하게 모르겠네….”
안애숙은 다 비슷해서 뭐가 다른지 찾지 못했다. 안종필은 피식 웃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변칙처리’ ‘가결’ ‘기습통과’라고 짚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내가 이런 제목을 달았다고 여동생에게 알려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참고자료]
◎ 권도홍, 『날씨 좋은 날에 불던 바람-권도홍 편집기자 자전』 나남, 2010
◎ 한국기자협회, 『한국기자상 50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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