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조치 공포시대… "장관이 만나자는 전갈 왔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⑮동아일보 노조 출범, 정권과 사측의 양면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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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 후 최초의 시위를 벌인 서울대 문리대생들. 1973년 10월2일 /사진 자료=한국기자협회 발행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3년 10월부터 대학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가 잇따라 일어나자 재야인사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천관우, 지학순 등 재야인사들은 12월24일 유신헌법 철폐를 위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 보름 만에 서명자 명단이 40만명에 이르렀다. 해를 넘긴 1974년 1월 초에는 이호철, 임헌영, 백낙청 등 문인들이 ‘개헌 서명지지 선언’을 하는 등 개헌 서명 운동이 폭발성을 띠자 박정희는 긴급조치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가의 안전보장 등을 이유로 긴급조치를 발동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동하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었고,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박정희는 1974년 1월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표했다. 1호의 주요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방하거나 헌법 개정을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일반 재판이 아닌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게 했는데, 2호는 1호를 시행하기 위한 비상군법회의 설치에 관한 것이었다.

긴급조치 1·2호는 언론의 숨통을 다시 조였다. 권력의 제작 관여는 더욱 심해져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는 신문에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 보도할 것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기자들의 좌절감은 쌓여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1974년 3월 단행된 동아방송 인사는 기자들의 불만에 기름을 끼얹었다.

동아일보사는 3월1일자로 동아방송 인사를 하면서 사회문화부 기자 고준환 등 2명을 프로듀서로, 다른 1명은 영업부 사원으로 전격 발령했다. 세 사람은 기자직으로 선발돼 입사한 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을 프로듀서나 일반직 사원으로 보내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자들은 회사 측의 인사에 충격을 받았다.

세 기자가 다른 직종으로 인사발령을 받은 3월5일 저녁 동아방송 사회문화부 기자들은 무교동 한 식당에서 송별회를 가졌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기자들은 인사의 부당함을 비판했다. 그러던 중 한 기자가 “노조를 만들지 않으면 이런 사건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의기투합한 기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우연히 옆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던 조학래, 박순철, 박종만, 양한수가 합류했다. 그 길로 신당동 김두식의 집으로 몰려갔다. 김두식의 집에 모인 사람은 모두 12명으로, 1967년에 입사한 공채 10기가 주축이었다.

3월6일 밤 김두식의 집은 북적였다. 전날 12명을 더해 그날 밤엔 33명이 모였다. 편집국, 방송국, 출판부 기자들이었다. 기자들은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동아노조) 창립총회를 열고 노조를 결성했다. 지부장은 조학래가 맡고 부지부장은 문영희·김두식·이영록, 사무장 정영일, 회계감사 이기중·임부섭, 총무부장 양한수, 쟁의부장 강정문, 조직부장 성유보, 섭외부장 이부영을 선임했다.

동아노조는 3월7일 오전 노조 창립을 알리는 유인물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서울시에 노조설립 신고서를 제출했다. 3월7일 하루 동안 103명이 노조에 가입했는데, 안종필도 가입 신청서에 서명했다. 안종필은 노조에 가입한 몇 안 되는 차장급 기자였다. 차장이나 부장 등 간부들은 회사 측 편에 서기가 쉬운데, 안종필은 한해 전 연판장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노조를 결성한 후배들에게 힘을 보탰다. 그가 훗날 기자협회 분회장, 동아투위 위원장을 맡은 배경에 이런 이유가 있었다.

동아일보사는 동아노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임의 칼을 빼들었다. 사측은 3월8일 긴급이사회와 인사위원회를 잇달아 열고 노조 간부 11명 전원과 박지동·심재택 등 13명을 무더기로 해임했다. 기자들은 노조 집행부가 전격 해고되자 부당해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권근술, 김동현, 김민남, 김양래, 김용정, 김종철, 김진홍, 박순철, 박종만, 오정환, 이종대, 전만길, 홍종민이었다.

1974년 3월6일 젊은 기자 33명을 발기인으로 결성된 동아노조는 하루 만에 103명의 조합원이 가입해 언론자유수호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사진은 3월8일 서울시에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로 등록 신청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조합원들에게 알린 노조의 3월9일자 공문이다.

해고 기자들이 3월13일 김상만 사장을 상대로 서울민사지법에 해고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제출하자 경영진은 대책위 소속 5명(권근술, 김동현, 김종철, 박순철, 박종만)과 고준환을 해임하고 김민남, 김양래, 이종대, 홍종민, 김영일, 송경선 등 6명을 무기정직 처분했다. 전만길 등 10명은 4개월 감봉에 처했다. 이에 맞서 동아노조는 3월14일 문화부 기자 김병익 등 15명으로 2차 부당해임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2차 대책위는 “35명의 무고한 동료들이 부당한 처벌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회사의 어떠한 조치에도 굴함이 없이 의연히 우리의 자세를 견지해 나갈 것”이라며 노조의 정당성 인정과 부당해임 및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기자들의 노조 설립을 적극 방해했다. 동아노조의 결성이 타 언론사로 확산될 경우 언론통제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노조설립신고서를 접수했던 서울시는 4월4일 “노조 임원 전원이 현재 동아일보에 재직하지 않아 신고증을 교부할 수 없다”며 신고서를 반려했다. 노조 임원들이 해고되었기 때문에 노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우스꽝스러운 논리였다. 노조가 합법적으로 결성된 뒤에 사용자 측이 집행부를 해고하면 노조는 해산해야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동아노조 결성 직후 문화공보부 장관은 당시 문공부 출입기자였던 박순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관이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는 회사와 기자들이 한 발씩 뒤로 물러나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렇게 원상회복을 하자고 했다. 나는 노조의 공식 대표는 아니었지만, 그런 타협을 거부한다는 노조의 입장을 웃으면서 전달했다. 언론노조 같은 수상한 저항 조직에 대해 정권이 관계부처를 동원해 해체를 기도하는 것쯤 당연시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동아노조가 승인 투쟁을 하던 1974년 4월4일 동아일보 1면은 ‘대통령 긴급조치 4호’ 기사로 뒤덮였다. 섬뜩한 제목들이 굵직한 글씨로 뽑혀 있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4월3일 특별담화를 통해 “소위 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공산세력의 배후 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지하조직을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며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또 그 구성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며, 이와 관련하여 권유하거나 선전·선동하는 것 또한 금지하였다. 또 학생의 수업 거부나 시험 거부, 집회와 농성 등을 일절 금하는 것은 물론, 이런 사실을 방송·보도·출판 등을 통해 타인에게 알리는 것까지 금하였고,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처분을 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이 조치를 위반하였을 때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배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되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4월25일 “민청학련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 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을 조작한 이 사건으로 수백 명이 고문을 당하고, 기소자 수십 명이 합계 1800여년의 천문학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수사과정에서 당한 무자비한 고문을 군법회의에서 폭로해도 신문과 방송에서는 그런 내용이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동아노조에 소속된 기자들이 개신교의 목요기도회와 천주교의 인권기도회를 찾아 구속자 가족들의 목소리를 기사로 써서 냈지만, 데스크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긴급조치 발동과 함께 설치된 비상고등군법회의. 1974년 1월10일. 사진 자료=한국기자협회 발행 ‘언론에 비친 한국정치’.

동아노조는 법적대응을 계속했다. 권근술 등 2차 해임 및 무기정직자 12명은 ‘해고 및 무기정직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추가로 제출했다. 가처분 신청 병합심리를 며칠 앞둔 4월12일 김상만 사장이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징계를 4월13일자로 사면’하지만 ‘노조 명의의 일체의 언동, 유인물 배포, 집회는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처분 소송에서 패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판결에 앞서 사면을 발표한 것이다.

동아노조 핵심 조합원 수십 명은 장시간 토론 끝에 복귀를 결정했다. 회사 복귀 뒤 조학래 지부장 등 동아노조 임원 4명은 김상만 사장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사장은 “이번 사태는 불행한 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집단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계통을 밟아 여러 번 이야기하면 결국은 젊은 기자들의 의사가 전달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고, 노조 임원들은 “등록 필증이 나오지 않더라도 노조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앞으로 사원들의 진정한 의사가 전달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동아노조는 노조설립 신고를 반려한 서울시장의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7월11일 서울고등법원에 냈다. 행정소송의 쟁점은 노조 임원의 회사 재직 여부였다. 서울시 측은 “노조 임원 전원이 현재 동아일보사에 재직하지 않고 있어 신고증을 내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조 측은 설립 신고서 제출 당시 노조 임원들이 회사에 재직하고 있었고, 서울시 논리대로 한다면 어떤 회사도 회사원들이 노조를 발기할 경우 그 즉시 관계자를 해고처분하면 노조설립 신고필증을 받을 수 없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재판부가 서울시 주장을 받아들이며 패소했다. 노조는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됐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동아노조는 법적지위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법외 노조’가 된 동아노조는 조합비 징수, 집행부 정기회의, 유인물 제작 등 기본적인 노조 활동을 펼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동아노조는 기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3월7일 103명에 달하던 조합원 수는 8일 168명, 9일 173명, 25일 187명, 4월9일 188명으로 대부분 기자가 노조에 가입했다.

동아노조 설립은 그해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운동으로 이어지는 등 유신독재에 맞선 자유언론 투쟁의 핵심적인 동력을 제공했다. 동아노조 결성에 이어 그해 12월 한국일보에서 노조가 결성됐고 언론사들은 내부 불만을 달래기 위해 대폭적인 임금인상을 단행했다. 동아일보가 1974년 4월에 하후상박 원칙으로 18~47% 인상한 것을 비롯해 서울신문(30~45%), 조선·한국·신아일보와 합동통신(30%), 중앙일보(32.5%), 경향신문(25%) 등 중앙과 지방의 신문들이 앞을 다투어 파격적으로 임금을 올렸다.


[참고자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2-유신체제기』, 2009, 돌베개
◎ 박순철, 『기자협회보 인터넷 연재 ‘1974, 그 후 50년’』,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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