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언론자유수호선언… 편집국서 사라진 중정 요원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⑭동아일보 앞 언론화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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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세상에 알린 기자협회보 1면(1971년 4월16일자).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1년 3월26일 오후 3시쯤, 안종필은 2층 공무국에 들렀다가 3층 편집국으로 올라왔다. 내근 기자들이 창가 앞에 모여 있었다. 구호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학생 30여명은 언론화형식을 갖고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을 발표했다.

“정치 문제는 폭력이 무서워서 못 쓰고, 사회 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감아주고, 문화기사는 판매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 동아야 너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는가.”

언론화형식은 득달같이 달려온 경찰에 10여분만에 해산됐다. 학생들이 해산되고 편집국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학생들의 성명서가 구구절절 옳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1971년 4월27일 박정희와 김대중 간의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권의 언론통제는 강화됐다. 중앙정보부는 언론사 편집국과 보도국에 정보요원을 상주시키다시피 하면서 기사의 보도 여부와 크기, 제목 등을 통제했다.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 시위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시위 현장에 기자들이 보이기만 하면 “취재해봤자 신문에 나가지도 않을 테니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비웃었다. 언론화형식은 무기력과 자기검열에 빠진 기자들을 쇠망치로 두들기는 듯했다.

학생들로부터 쏟아진 비판에 부끄러움을 느낀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은 4월15일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심재택 주도로 서권석 이종대 전만길 권근술 김종철 박종만 김용정 등 입사 3~4년차 기자들이 뜻을 모았다. 그날 오전 9시 선언문을 준비한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모임을 하려고 하자 부서장들이 말렸다. 30여명의 기자들은 출판국이 있는 별관 회의실로 옮겨 선언 행사를 치렀다. 간부급으로는 논설위원 송건호, 사회부 차장 김중배가 함께했다.

서권석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자유언론의 일선 담당자인 우리는 오늘의 언론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음을 통감하고 민주주의의 기초인 언론자유가 어떤 압력이나 사술(詐術)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엄숙히 선언한다….” 기자들은 △우리는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자유롭게 보도한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한다 △우리는 정보부 요원의 사내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 등 3개항을 결의했다.

최초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은 4월16일자 기자협회보 1면 머리기사로 알려졌다. 기자협회보는 머리기사 옆에 동아일보 기자들의 선언문을 전재하고, ‘기관원은 신문사에 상주말라’는 우리의 주장을 실었다.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주도한 심재택은 동아일보에서 3번이나 해직된 기자였다. 서울대 법대 1학년이던 1960년 4월19일 아침 강의실에 뛰어들어 강의를 중단시키고 선배들을 시위로 이끌었던 4·19혁명의 주역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구속됐던 그는 1967년 11월 공채 10기로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1971년 언론자유수호선언의 주동자로 찍혀 그해 12월 중앙정보부 압력에 의원해임 형식으로 사직했다가 1973년 3월에 복직했다. 1974년 3월 동아일보 노동조합 결성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두 번째로 해직됐다. 회사가 해고를 취소해 복직했으나 1975년 3월 부당해임 철회를 요구하며 제작거부를 벌이다 세 번째 해직됐다.

1971년 최초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주도한 심재택(1941~1999).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있던 그날 아침 편집국장 박권상은 중앙정보부 쪽 전화를 받았다. 박권상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5일 아침 일찍 중앙정보부 보안담당차장보에게서 기자들의 선언 경과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 동아일보는 출입하던 중정요원이 문화부쪽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차장보에게 “젊은 기자들이 당신들의 출입금지를 결의했다. 나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으니 당장 철수시켜달라”고 말했다. 그는 “고려해보겠다”고 답했고 나는 다시 “고려만으로는 안 된다. 지금 철수시키지 않으면 우리가 쫓아내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15분만 기다려달라. 부장(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허락을 받아 철수시키겠다”고 말했고 곧 그 요원은 사라졌다. 이날부터 8개월 후인 12월의 국가비상사태선포까지 기관원의 출입은 중단됐다.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이 촉발한 언론자유수호선언은 다른 언론사로 번졌다.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MBC 등 14개 언론사 기자들도 비슷한 내용의 선문을 발표했다. 한국기자협회도 전국 분회장, 시도지부장 회의를 열고 언론자유수호행동강령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최초의 언론자유수호선언에 대해 동아투위가 발행한 ‘자유언론 40년’(다섯수레, 2014)은 “1971년 봄의 1차 언론자유 수호운동은 그 운동이 시작될 때 일선 기자들이 가지고 있던 열의나 절박한 심정에 비해 그다지 뚜렷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선언’으로 그치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당시 언론을 옭아매고 있던 갖가지 탄압 장치가 강고해서 몇몇 젊은 기자들의 의욕만으로 돌파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971년 4월27일 치러진 7대 대선에서 김대중에 가까스로 이긴 박정희는 장기 집권을 추진했다. 그해 10월15일 서울시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해 무장군인을 대학에 주둔시켰다. 위수령 해제 요구 등 각계의 저항이 끊이지 않자 박정희는 12월6일 중국의 유엔 가입 등을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27일에는 ‘국가 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법은 집회 및 시위와 언론 출판 규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규제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특별조치를 위반하는 자에게 1년 이상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국가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중앙정보부 요원들의 언론사 출입이 재개됐다. 언론계는 극도로 움츠러들었다.

박정희는 ‘종신 독재’의 길로 무지막지하게 치달았다. 1972년 10월17일 저녁,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세종로 등 서울 시내 전역에 군 병력과 탱크가 배치된 삼엄한 분위기에서 발표된 그 선언은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일절 금지하며,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며,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새로운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10월27일 모습을 드러낸 ‘유신헌법안’의 핵심은 ‘삼권분립의 파괴’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으로 압축된다. 대통령에게 대법원장을 비롯한 모든 법관의 임면권을 넘겼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며 국회 해산권을 가졌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임기 6년의 대통령을 뽑고, 대통령 중임·연임제한도 철폐됐다. 대통령에게 긴급조치를 취할 비상권한을 부여했다.

유신헌법안은 11월21일 계엄령 속에서 국민투표에 부쳐 91.9%가 투표에 참여해 91.5%가 찬성해 통과됐다.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통해 뽑힌 대의원 2359명은 12월23일 체육관에 모여 99% 찬성으로 단독 출마한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1971년 7대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이번에 박정희가 승리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영구 집권의 총통 시대가 온다”고 경고했는데 현실화한 것이다.

1972년 10월17일 청와대에서 김성진 대변인이 박정희 대통령의 10.17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유신체제 구축을 위한 비상계엄 선포로 언론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한층 드세졌다. 정부 일부 부처와 국회, 경찰서 출입기자실은 폐쇄됐고,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 검열을 받고 뉴스를 내보내야 했다. 신문 지면은 일방적인 유신 찬양 해설기사와 논설만으로 채워졌다. 당시 서울시청엔 계엄사 검열단이 차려졌다. 검열 심부름은 편집부 기자들이 주로 맡았다. 기자들은 대장(신문을 조판한 뒤에 교정지와 대조하기 위하여 간단하게 찍어 내는 인쇄용지)을 들고 계엄사 공보장교들에게 검열을 받았다. 군인들은 빨간 펜으로 마음에 들지 않은 기사를 난도질하고 삭제를 지시했다. 참담했던 기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소주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터뜨리는 것밖에 없었다.

유신 독재의 압력에 허우적대던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3년 3월 ‘연판장 사건’을 일으켰다. 정치부 기자 안성열을 중심으로 우승용 조학래 이종대 등이 연판장을 돌리면서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기자들은 독자적인 편집권 행사와 신문 지면의 쇄신, 합리적인 인사이동, 근무연한에 맞는 봉급 조정 등을 요구했다. 연판장 서명은 순식간에 100여명에 이르렀다. 그해 편집부 차장으로 승진한 안종필도 연판장에 서명했다.

이 사건은 편집국 기자의 70% 이상이 서명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회사 측의 방해와 모략으로 기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는 등 부작용도 남겼다. 그러나 이 사건은 기자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자문하는 계기가 됐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또는 기별, 부서별로 모임이 하나둘 생겨났고, 기자들은 집에서 집으로 돌아다니며 소그룹 활동을 펼쳤다. 연판장 사건은 기자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1974년 3월 동아일보 노동조합 설립,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등 자유언론운동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자들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 지면에서 진짜 뉴스는 점점 사라져갔다. 최초의 유신반대 시위인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비롯해 10월4일 서울대 법대, 10월5일 서울대 상대에서 일어난 시위는 동아일보에서 보도되지 않았다. 마침내 동아일보 10·11·12·13기 출신 젊은 기자 50여명이 기사 누락에 항의하는 뜻으로 10월7일 편집국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했다. 동아일보 사상 기자들이 신문제작에 항의해 벌인 첫 번째 집단행동이었다.

기자들 철야농성 다음날인 10월8일자 7면에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상대 학생들 시위 기사가 실렸다. ‘서울대학생 21명 구속’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기사는 1단에 불과했으나 사회면 한가운데에 눈에 띄게 편집됐다. 그러나 이 기사는 유신반대라는 시위대의 주장을 명확히 기술하지 않고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라는 등의 선언문을 낭독했다”고 두어줄 붙인 게 고작이었다.

11월 초 경북대생 시위와 서울 YMCA 앞에서 열린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시국선언 낭독 사건이 보도되지 않자 기자들은 △중요한 기사가 누락되었을 때 그 경위를 알아보고 그날 밤으로 편집국에 모여 대책을 협의한다 △선후배 동료가 부당하게 연행됐을 때 즉시 보도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등 2개항을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기자들은 그 결의에 따라 11월7일, 17일, 20일에도 편집국에서 밤샘을 했는데, 11월20일 농성 때는 ‘언론자유수호 제2선언문’을 발표했으며, 12월3일에는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어 ‘언론자유수호 제3선언문’을 채택했다. 회사는 “사내 철야 등 집단 행동을 금지한다”는 방을 붙였다.


[참고자료]
◎ 동아일보사 노동조합, 『동아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 1986
◎ 한국기자협회, 『기자협회30년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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