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관이 제지한 찰나에 오간 '눈과 눈의 대화'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㉑동아투위 2대 위원장 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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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청우회 사건’으로 2년 6개월을 복역한 이부영은 1977년 12월26일 만기 출감했다. 전주교도소를 출발해 그날 오후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이부영이 마중 나온 동료들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바로 뒤가 안종필.

1977년 들어 민주화운동 열기가 조금씩 활기를 띠자 당국은 재야인사들에 대한 사찰활동을 강화했다. 동아투위 사무실 주변엔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서울시경, 보안사, 종로경찰서 등 5~6개 수사기관 요원들이 감시망을 펴고 있었다. 기자들의 집에도 각 기관의 이른바 ‘담당들’이 배치됐다. 그들은 수시로 찾아와 어떤 때는 몇십만원 짜리 직장을 알선해줄테니 이제 그만하라며 회유했다.

당시 동아투위 내부에선 투쟁 방식을 놓고 논쟁이 있었다. 싸움의 상대는 동아일보사인만큼 동아투위 역할을 자유언론운동에 한정해야 한다는 의견과 각계각층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연대해 적극적으로 반독재투쟁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렸다. 그 노선 논쟁은 1977년 4월 중순 ‘민주구국헌장’ 서명 사건이 터지면서 민주화투쟁 쪽으로 기울었다. 계기는 ‘민주구국헌장’에 서명한 동아투위 위원 54명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다.

재야인사들은 그해 3월 ‘3·1민주구국선언’(1976년 3월 함석헌 등 재야인사 10명이 발표한 문건) 사건 대법원 판결에 앞서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철폐를 촉구하는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다. 헌장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졌고, 동아투위 위원 54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중앙정보부는 4월15일부터 4월24일까지 권영자를 비롯해 박종만, 안성열, 김종철, 홍종민, 이병주 등을 연행해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동아투위 리더십 교체가 이뤄졌다. 온갖 신변 위협을 감수하며 2년 동안 동아투위를 이끌어 온 초대 위원장 권영자가 사의를 표명했다. 동아투위는 후임 위원장으로 안종필을 만장일치로 추천했다. 상근총무로 권영자와 함께 동아투위 사무실을 지킨 박종만도 총무의 짐을 10·24 자유언론실천 당시 선언문을 낭독한 홍종민에게 넘겼다. 동아투위는 1977년 5월17일 정례모임에서 위원장 교체와 함께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동참하고 연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동아투위가 그해 6월17일에 발간한 ‘동아투위소식’엔 제2대 위원장 안종필의 취임사가 실렸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장직을 맡은 본인은 영광보다 오히려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전임 권 위원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탁월한 지도 역량에 비해볼 때 본인은 미숙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자신감에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투위가 발족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2년여 동안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불굴의 의지로 이겨나왔으며 자유언론에의 불타는 열정을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승화시켜온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아일보사에서 강제축출을 당한 지 2년여 동안 인내의 한계를 실감할 정도의 시련 속에서 지내왔지만, 정말 모두들 용하게 견디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100여 동지들이 각자 생존을 위해 뿔뿔이 헤어져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비록 다른 직장에 흩어져 있다고 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언제나 자유언론의 기치 아래 굳게 뭉쳐 다시 펜과 마이크를 잡고 뛰겠다는 이상을 품고 살아갈 것을 확신합니다.
한편 우리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 일처럼 우리를 도와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수많은 재야민주인사와 특히 부당인사조치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무료로 맡기로 결정한 서울제일변호사회, 그리고 직접 변호를 담당해주시는 변호사님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이분들의 염려와 성원에 보답하는 길은 우리들이 어떠한 난관에도 단결과 용기와 슬기로 극복해서 언론인 본연의 자세로 재기, 지난 체험(시련)을 거울삼아 진실된 보도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길이 동아투위에 부과된 역사적인 소명이며 참다운 언론인이 걸어가야할 정도라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들의 지도와 편달을 바랍니다.

안종필은 취임사에서 동아투위 위원장직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자신감을 피력했다.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동지들이 있어 두렵지 않다며 자유언론은 역사의 소명이라고 역설했다.

동아투위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안종필은 홍종민과 함께 동아투위가 2년 전 동아일보사를 상대로 제기한 ‘해고 및 무기정직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 항소심 재판을 챙기는 등 동아투위 활동을 이어갔다. 각자 생업에 치이느라 발걸음이 뜸했던 위원들이 청진동 동화빌딩 303호실로 옮긴 동아투위 사무실에 들르기 시작했다.

안종필은 그해 7월7일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했다. 전주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는 이부영을 면회하는 가족들 행렬에 동행했다. 이부영의 아내 임수향씨와 여섯 살 딸, 두 살배기 아들이 함께했다. 1975년 6월 ‘청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이부영은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영등포구치소, 서울구치소, 안양교도소를 거쳐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1977년 7월7일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부영의 가족 면회에 동행한 안종필이 ‘동아투위소식’ 1977년 7월16일자에 실은 면회기.

그날 만기 6개월을 앞둔 이부영을 먼빛으로 만나고 돌아온 안종필은 7월16일자 <동아투위소식>에 ‘눈과 눈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옥중면회기를 실었다.

지금은 어두운 사색의 면벽에서 번뇌하는 이부영 기자. 가족 이외는 면회조차 불허한다는 옥중(?)임을 알면서도 면회길 전주행렬에 따라 나섰다. 전주행렬 이랬자 사랑하는 그의 아내와 이제 겨우 여섯 살의 딸 근하, 두살잡이 아들 도균이다. 내가 이 행렬에 선뜻 나선 것은 이 기자를 모처럼 먼빛으로 만난다는 의미보다 이 행렬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선 것이기 때문이다.
7월7일, 어제까지도 소나기가 내려 걱정을 하는데 맑은 날씨라 마음이 놓였다. 어느 직업보다 가장 용기가 있어야 하고, 가장 순수해야 하고, 가장 수척해야 할 기자가 무기력하고 불의로 가득 차고 비만의 위세가 판치는 게 싫어 스스로 고난의 이 길을 택한 순전히 ‘자의의 희생’임을 나는 알고 있네만 이 행렬에 대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자문해보았다. 부부의 정리가 무엇인데 남편 옥바라지에 자식 뒷바라지까지 무거운 짐을 내맡겼단 말인가? 지금쯤은 출근길 아빠에게 응석을 부려야 할 재롱둥이, 밤이면 아버지의 팔베개에 새록새록 잠들어야 할 아들, 딸을 두고 홀로 단절의 벽(壁)속에서 아픔과 쓰라림과 괴로움의 여행(予行)을 한단 말인가? 어쩌면 이 여행은 끊임없이 반복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와 자유의 역사는 이런 여행속의 혈적을 밟으며 완숙하는 것이니까.
차창 밖에는 흠뻑 물고인 논에서 농부들이 바쁘게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불의에 탁류처럼 흐르는 서울을 멀리하면 할수록 신선한 풀냄새와 함께 옥중면회길의 경직이 풀리는 듯 했다.

전주교도소. 전주 도심에서 택시로 20분 정도의 거리. 멀리 언덕 위서 회색의 담장이 들어나자 섬찍했다. 75년 3월17일 새벽 통금시간에 동아일보사에서 개 끌려 나오듯이 나온 130여 동지들은 2년반 동안 무진 수난을 겪었다. 그 중에 서권석, 박종만, 김종철 기자가 잠시 서대문교도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지금 낯선 전주땅에 와 있는 이부영 기자와 나는 서대문교도소로 김종철 기자를 면회 갔었다. 그때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무거운 교도소 정문을 들어섰을 때 교소도의 증축공사가 한창이라 이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면회접수를 마친 근하 어머니와 나는 닥쳐올 순간을 침묵으로 기다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18번 접수의 근하 어머니를 부르며 1번 면회소에서 면회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나는 부부가 두터운 유리가 가로지른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몇 개의 연필구멍만한 대화구를 통해 얘기하는 광경을 그리며 문틈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시력이 청력을 빼앗은 건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만치 이부영 기자가 서서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일순 무어라고 얘기하는 듯 눈빛이 반짝이며 손을 흔들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때 교도관으로부터 제지를 당해 문을 닫고 나왔다. 다만 눈과 눈의 대화가 오고 간 찰나였다.
한 달에 한 번밖에 못하는 면회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시국에 관한 대정부건의안이 국회서 채택된 이 즈음 구속인사 석방에 긴급조치 하에 구속된 유일한 기자 이부영군이 석방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귀로. 근하 엄마의 전언은 바깥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서 안에서 바깥 동지들을 태산같이 걱정하더라고 하면서 지난 7월2일 집에 보낸 편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수향 보구려.

(……)마음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당신이나 내가 그리는 것이 한 치 한 치 이뤄지고 있고 확신시키고 있소. 따라서 조금 늦어지거나 빨라지거나 관계없이 거짓과 불의는 언제까지나 장막에 가려져 있을 수 없을 거라는 거요. (……) 무슨 값있는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한국엠네스티와 기타 민주인사들의 호의를 받게 되니 고마울뿐이요. 그분들에게 감사드릴 것을 잊지 마시오. (……)

‘눈과 눈’에는 가족 면회에 동행하면서 느낀 심정과 이부영과의 짧은 만남이 그려져 있다. 안종필은 전주교도소의 증축공사를 보며 양심수들을 감옥으로 몰아대는 유신독재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이 글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눈과 눈의 대화가 오간 찰나다. 무어라고 얘기하는 듯한 이부영의 눈빛에서 안종필은 무엇을 봤을까? 감옥살이에도 위축되지 않고 투지를 불태우는 이부영의 심연을 봤을 테고, 혈육보다 더 진한 동지애를 확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안종필은 자신이 가는 길이 결코 외롭지 않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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