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의로운 일 하다 잘렸는데 나라도 있어야지…"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⑳을지로 3가 한국메디칼인덱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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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약대 동아리 ‘소모임’ 회원들이 안종필의 단짝 김용찬(사진 앞쭐 오른쪽)과 찍은 사진. 김용찬이 1970년대 한국메디칼인덱스사에서 의약품 전문서적을 출판할 때 ‘소모임’ 후배들이 도움을 줬다. /신영호 제공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안민영은 아버지가 동아일보에서 해고된 1975년 월계국민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안민영은 신문사에 대해 발표하는 숙제가 있어 친구들을 데리고 동아일보사에 갔다. 반 친구들은 민영이 아버지가 동아일보 기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소년동아’에 월계국민학교 기사가 실렸다. 민영이 아버지 덕분에 우리 학교가 ‘소년동아’에 소개됐다고 교장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광화문 네거리에 도착한 안민영은 동아일보사를 가리키며 친구들에게 말했다. “저기가 우리 아빠가 근무하는 회사야.” 친구들은 부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안민영은 사옥 정문에서 경비에게 꾸벅 인사했다. 전에 아버지랑 몇 번 왔던 터라 안면이 있던 경비는 그날따라 우물쭈물했다. 경비가 어디로 연락하는가 싶더니 기자들 몇몇이 내려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들이었다. “어쩌지, 아버지 외근 나가셨는데….”

안민영은 기자들이 당황해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가 회사에 안 계시니 다음에 오자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실망한 표정인 친구들을 데리고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김밥, 순대를 사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낮에 동아일보사에 갔던 일을 전했는데 어머니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안민영은 아버지가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뒷날 알았다.

안민영의 회고다. “이상했어요.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아버지의 일상이 예전과 달랐어요. 낮에 집에 계실 때도 있고, 외할아버지 공장 일 도와주러 간다고 하고…. 한 번은 아버지 따라 사무실에 갔는데, 회사가 아닌 어떤 곳에서 아저씨들이 모여서 얘기하고 한쪽에선 바둑을 두고 계셨어요. 아버지가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해직된 줄 몰랐죠.”

◇“안 서방이랑 일 못하겠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나고 6~7개월이 지난 1975년 가을 무렵, 안종필은 청계천 공장으로 출근했다. 그의 장인 이만수는 청계천에서 전기장판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공장에 기숙사가 딸린 꽤 규모가 있는 회사였다. 이만수는 서울로 이사 오기 전 부산에서 공사장에 철근을 대는 철근사업, 셀룰로이드 안경공장을 운영하는 등 사업 수완이 있었다.


이만수는 기자 일밖에 모르는 사위가 자신의 사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안종필을 부른 것은 하루아침에 쫓겨난 사위가 안쓰럽고 세상도 배울 겸 옆에 두고 회사 일을 가르치고 싶었다. 안종필은 장인의 기대와 달리 움직였다. 수익보다는 공장 노동자들 처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장인에게 쓴소리했다. 이만수는 못마땅한 듯이 딸에게 말했다. “안 서방이랑 같이 못 하겠다. 경영은 신경 쓰지 않고 노조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안종필은 1976년 봄쯤 을지로 3가 인쇄골목에 있는 허름한 건물 3층으로 출근했다. 안종필의 경남고등학교 동기 김용찬이 서울대 약대 15회 동창인 김영호와 차린 의약품집 전문출판사 한국메디칼인덱스사 사무실이었다. 발행인 김영호는 사업체가 따로 있어 관여하지 않고 김용찬이 편집인을 맡아 출판사를 운영했다. 두 사람은 서울대 약대 재학 시절인 1958년 ‘소모임’을 만들어 후배들과 함께 농촌봉사 활동을 했다.


한국메디칼인덱스사의 첫 작품은 ‘MEDICAL INDEX(메디칼인덱스)’였다. 김용찬은 안종필이 합류하기 전인 1975년 3월 서울대 약대 25회 신영호 등과 함께 의약품 자료집 ‘메디칼인덱스’를 기획해 발간했다. 당시 국내에서 유통되던 의약품 3100여종에 대한 처방과 그 설명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한국 최초의 의약품 백과사전으로 불린다.

해직기자 시절 안종필은 의약품 전문출판사 한국메디칼인덱사에서 근무했다. 한국메디칼인덱스사에 출판한 책들.

김용찬은 경남고 다닐 때부터 안종필과 단짝이었다. 1975년 3월 안종필이 닷새간 편집국에서 농성할 때 매일 전화해 안부를 묻고, 동아일보사 앞 침묵시위 현장에 자주 찾아와 응원하던 절친한 친구였다. 그 스스로 동아투위 위원은 아니지만 준위원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김용찬은 해직되고 적을 둘 곳이 없던 안종필을 불렀다. 친구가 의로운 일을 하다가 어렵게 됐는데 자신이라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심정이었다. 메디칼인덱스사는 1976년 ‘메디칼인덱스 추보판A’, ‘약물상호작용과 투약’ ‘처방설계’ 등을 펴냈는데 안종필은 편집을 도왔다. 동아일보 후배 김동현은 당시 을지로 3가 사무실에서 약학 관련 책을 교정 보던 안종필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 무렵, 서울특별시약사회가 월간잡지 ‘서울약사회지’를 창간하며 위탁 제작을 한국메디칼인덱스사에 맡겼다. 김용찬이 창간을 발의한 서울약사회지는 1976년 7월 창간호를 한 차례 내고 1977년 1월부터 매달 발행했다. 안종필은 김용찬을 도와 서울약사회지 발행에 힘을 보탰다. 약사회지에 실을 아이템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게 안종필의 일이었다.

◇학술지에 실린 대한약사회 고발 기사
대한약사회가 기관지로 발행하는 ‘약사공론’이 약업계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라면 ‘서울약사회지’는 약사들에게 공부할 수 있는 전문자료를 제공한다는 취지의 학술지였다. 그런데 서울약사회지 1977년 1월호에 시커먼 컷으로 ‘경리부정 4千6百餘萬원’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대한약사회(회장 민관식)가 저지른 엄청난 부패의 일각이 대한약사회에서 운영하는 기관지 ‘약사공론’사의 경영부정에서 드러나 2만여 약사와 약업계 인사들의 통분을 자아내고 있다. 지난 1월18일 대한약사회 감사단이 ‘약사공론’사를 전격 감사한 결과 김모 총무국장이 1525만9190원을 임의횡령하고 3165만570원을 임의유용 반제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막대한 부정은 도지부나 분회 예산보다 큰 규모다….”

서울약사회지 1977년 1월호(사진 왼쪽)와 첫 페이지에 실린 대한약사회 경리부정 기사. 해직기자 시절 안종필이 한국메디칼인덱스사에 근무할 때 직접 쓰고 편집한 기사.

어떻게 학술지 첫 페이지에 고발 기사 성격의 글이 눈에 띄게 편집돼 실렸을까. 당시 한국메디칼인덱스사에서 안종필과 근무한 신영호는 민관식 대한약사회장과 김성준 서울약사회장 사이에 다툼이 있을 때 이 글이 실렸는데, 안종필이 썼다고 술회했다.


메디칼인덱스사는 1970년대 서울대 약대 운동권들 아지트라고 해도 무방했다. 운동권 학생들이 방학 때, 입대 전에 아르바이트 겸해서 들락날락했다. 전문서적이라 사업성이 변변찮고 인력 사정이 열악해 학생들 도움이 필요했다. 신영호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매주 찾아왔는데, 안종필은 주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곤란을 겪을 수 있어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했다고 기억했다.


안종필은 동아투위 2대 위원장에 취임하고도 한동안 메디칼인덱스사와 인연을 이어갔다. 국내 약학박사 1호이자 서울대 약대 교수인 홍문화 박사의 책 ‘약이냐 독이냐(1978년 3월 발간)’, ‘신동의보감(1978년 7월 발행)’ 제작에 관여했다. 홍문화 박사의 책에 대해 여동생 안애숙은 이렇게 기억한다. “큰오빠가 팔이 아프게 편집한 책이잖아요. 책을 보따리에 싸서 지인들에게 팔러 다녔어요. 좀 많이 팔았나 봐요. 오빠가 그랬어요. ‘우리 애숙이가 요즘 책 팔러 다니느라 고생한다’….”


메디칼인덱스사가 의약품 서적이 아니라 홍문화 박사의 에세이를 발간한 숨은 일화가 있다. 1977년 9월 청람문화사가 출간한 ‘모모’가 폭발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장안의 화제가 됐다. 청람문화사는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권근술을 비롯해 조선일보 해직기자 최준명, 최병준, 임희순이 1976년 여름 차린 출판사다.


신영호의 회고다. “우리도 ‘모모’ 같은 책을 내보자 해서 홍문화 선생이 일간지에 연재했던 건강에 관한 글을 모아 2권의 단행본으로 냈어요. 저는 마지막 교정과 주석 작업을 몇 주에 걸쳐 일요일에 흑석동 홍문화 선생 댁에서 했고 편집은 안종필 선생이 했던 것 같아요.”


안종필은 메디칼인덱스사에 출근하면서 매달 3월17일 동아투위 월례모임에 참석하는 등 동아투위 활동에 빠지지 않았다. 1976년 12월 청진동 빈대떡집에서 모임이 있었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 현장을 취재해 사진과 함께 전 세계에 타전한 AP통신 기자 홍건표의 환송연이었다. 중앙정보부가 홍건표를 구속한다는 말이 돌면서 서울지국은 뉴욕 AP본사와 도쿄 AP동북아총국과 상의해 그를 도쿄로 피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안종필을 비롯해 동아투위 동료 20여명은 도쿄로 떠나는 홍건표를 초대해 조촐한 저녁을 대접했다. 술잔이 서너 순배 돌고 나자 안종필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머뭇머뭇 말했다. “몇백 원씩 걷어서 만들었습니다. 동아투위의 정표로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76.12.1 동아투위’라고 안쪽에 새겨진 금반지였다. 안종필이 건넨 금반지를 받은 홍건표는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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