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항소심 선고 공판 이틀 후, 면회실을 찾은 이광자는 “8·15를 기대하지 마시고 오래 있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니 그렇게 아세요”라며 재판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꿋꿋이 버티라며 남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당신과 더불어 여러 사람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장하게 생각해요. 또 당신의 부인으로서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사는 거예요. 얘들 모두 내가 보살피고 있으니 당신은 꿋꿋하게 나가세요.”
항소심 재판이 끝나고 얼마후 감방은 적막강산이 되었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갇힌 대학생들이 광복절 특사로 대부분 풀려나거나 이감됐다. 감방엔 안종필과 홍종민, 김종철, 정연주 그리고 고려대 제적생 유구영만 남았다. 유구영은 고려대에서 유신철폐 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당한 뒤 잡혀 왔다. 대학생들이 모두 떠나버리자 안종필의 심정은 착잡했다.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그들을 통해 새롭게 알고 깨달았던 게 얼마나 많았던가. 9개월여의 감옥살이를 버틴 것도 대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갑자기 낯선 환경에 놓이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감옥살이는 도대체 언제나 끝날지, 동아일보 편집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안종필은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졌다. 온갖 상념이 밀려들었던지 안종필은 면회 온 장인에게 일본어로 된 소설책과 역사책을 넣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책 읽고 편지를 보내고 대법원에 제출할 상고이유서를 쓰며 한 달을 보냈다.
8월 말 어느 날부터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왕래할 수 있게 됐다. 보안과장은 아침부터 오후 4시 폐방 때까지 철문을 열어주라고 교도관에 지시했다. 한방에 모여 바둑을 두거나 장기를 두고 특식을 시켜 나눠 먹고 토론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방에는 라면상자를 뜯어서 만든 바둑판, 찐빵으로 만든 바둑알들이 있었다. 바둑알을 제조하는 방법은 이랬다. 사식으로 판매하는 찐빵의 밀가루 부분을 떼어내 물에 반죽해 동그랗게 뭉쳐서 말린다. 딴딴해지면 백돌이 되고, 연탄재를 섞으면 흑돌이 됐다. 안종필과 동료들의 바둑 실력은 엇비슷해 대국을 벌이면 흥미진진했다.
안종필이 옥중서 구상한 ‘새 시대 새 언론’
9월 어느 날, 안종필은 수감 중인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새 언론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새 시대가 와서 우리가 언론계에서 다시 일할 수 있게 될 때, 구체적으로 신문은 어떻게 만들고, 경영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가로쓰기에 한글전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신문은 너무 식자층 중심으로 제작되고 있는데, 민중을 위한 진정한 신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전용을 해야 한다. 편집도 지금처럼 정치·경제·사회·문화 이런 식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종합편집을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같은 부처 출입제도 없어져야 한다. 너무 관(官) 위주의 취재여서 민중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새 시대가 오면, 국민들이 골고루 출자해서 그들이 주인이 되는 신문사를 세우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 사람이 신문사를 좌지우지하지 못할 테고, 편집권은 독립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신문도 아니고 우리 신문이라는 생각에서 제작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이다.”
김종철, 정연주, 홍종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김종철은 훗날 “감옥에 갇혀 있는 분이 저렇게 뜬구름 잡는 말씀을 하시다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그 럴만했다. 세로쓰기에 한글과 한문이 섞인 신문이 전부인 시대에 가로쓰기, 한글전용이라니. 더구나 국민출자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가 새 시대의 새 신문을 언제부터 구상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안종필이 1977년 5월 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동아투위는 “자유언론은 민주언론, 민족언론임을 선언”했고, 기존 언론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참언론을 주창했다. 안종필을 영어의 몸이 되게 한 ‘민주인권일지’ 사건도 따지고 보면 기존 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안종필은 민주언론, 참언론에 대한 고민을 축적했고, 새 시대의 신문상을 구체적으로 한글에 가로쓰기, 국민이 소유한 언론사로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동료들도 생뚱맞다고 생각한 이 구상은 여러 언론인들의 노력이 더해지면서 9년 후 한겨레신문으로 현실화된다.
안종필의 감옥살이도 1년이 다 되어갔다. 10월9일 아내에게 쓴 편지는 안종필의 당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당신과 헤어져 생활한 지 어언 1년이 가까워 오는구려. 오는 24일이면 10·24 5주년이니…. 작년 그날부터 당신과 아이들과 생이별을 하였으니 세월이란 무척 빠른가 보군요.
이곳은 당신과 수많은 동료들이 염려해주는 덕분에 건강하게 잘있소. 김종철 홍종민 정연주씨 모두 명랑하게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소.
우리들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신문기자로서의 직업윤리에 충실하다 이렇게 수난을 받게 된 것도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하며 우리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고난받고 있는 사람과 한 대열에 동참하게 된 것 기쁘게 생각하고 있소. 이러한 시련이 조국의 민주 발전에 밑거름이 되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유장함이나 당파싸움으로 유배당한 정다산이 유배지에서 목민심서라는 명저를 남긴 정열을 새삼 가슴 속에 새기고 있소. 스피노자 역시 종교재판에서 파문을 당하고 자기 조국을 망명한 사실을 생각해보면 유장함도 박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역설적인 해석도 해봐요.
윤활식 선배, 장윤환, 안성열, 성유보, 이기중, 박종만씨 등과 한자리에서 무릎을 맞대고 지난날을 얘기할 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소. 우리들은 어차피 같은 길을 가는 동지들이니 무슨 흉허물이 있겠소. 밖에서 우리들을 기다리는 동료들,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운 그 동지애를 생각하면 건강하게 튼튼한 몸으로 만나는 것이 그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여기고 운동 많이 하고 있오.
당신과 만나는 날 기다리며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엉뚱한 공상도 해보고 있소. 민영, 예림 잘 부탁하오. 조금만 참으면 자유스러운 우리들의 오붓한 시간이 올 것을 확신합니다. 하느님께 기도 많이 하시오. 우리들을 걱정하는 수많은 고마우신 분들께 뜨거운 인사 잊지 마시오.”
지금의 이 시련은 기자로서의 직업윤리에 충실한 것이기에 후회가 없으며 스피노자와 정약용에 투영해 1년여의 감옥살이가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보여준다. 감옥에 갇힌 동료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동료들의 동지애를 생각하는 안종필의 인간적인 모습도 볼 수 있다. “조금만 참으면 자유스러운 오붓한 시간이 올 것을 확신한다”며 편지를 끝내고 있는데 어떤 예감이 들었던 것일까.
새벽 5시 라디오뉴스 통해 알려진 박정희 죽음
박정희 대통령 죽음은 10월27일 새벽 5시 라디오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박정희의 유고(有故)로 그날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제주도 제외)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대통령 권한 대행은 최규하 국무총리가 수행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유고 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건 이날 오전 7시25분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의 공식 발표였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10월26일 저녁 6시경 시내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하시어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만찬을 드시는 도중에 김 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 간에 우발적인 충돌사태가 야기되어 김 정보부장이 발사한 총탄으로 이날 저녁 7시50분 서거하셨습니다.”
외부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었기에 성동구치소에 있던 안종필과 동료들은 박 대통령이 피살됐다는 소식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0월27일 아침에 교대로 들어온 교도관이 평상복 대신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면회도 금지됐다. 무슨 비상사태라도 생겼느냐고 물어도 교도관은 어물어물하면서 가버렸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지도(형이 확정된 기결수 가운데 행형 성적이 좋은 사람을 뽑아 교도관 보조로 일을 시키는데, 이를 ‘지도’라고 부름)가 사식을 주문받으러 왔다. 지도가 방 앞에 오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왜 아직 안 나가고 여기 계세요?”
정연주는 의아한 눈으로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럼 아직도 모르시는 거예요?”
“모르긴 뭘 몰라?”
“박정희가 총 맞아 죽었잖아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쏴서 죽였대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종필이 경상도 사투리로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이 아아가 돌았나. 니 지금 뭐라 캤노?” 20대 후반의 지도는 작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선생님, 정말이라니까요….”
그제야 모든 게 확실해졌다. 교도관들이 군복을 입고 근무하고, 교도소 담 너머 동사무소의 깃대 끝에 있어야 할 태극기가 밑으로 내려가 있었고, 확성기에서 조가 비슷한 음악이 울려 나왔는데, 이 모든 게 박정희 피살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아챈 것이다. 안종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박정희가 죽었다면 이제 나라는 민주화되고 우리는 당연히 집에 가야 되는 것 아닌가?” 정연주가 감방 구석에 놓인 짐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기며 농담조로 말했다. “성님들, 나 지금 집에 갈랍니다.”
안종필과 동료들은 그날 저녁 돼지고기튀김 등 푸짐한 사식을 주문해 배불리 먹었다. 곧 풀려날 거라는 기대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이틀 뒤인 10월30일 아침에 이광자가 면회를 왔다. 면회실에 들어선 이광자는 안종필이 박정희 피살 소식을 알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광자는 집안 모두 편안히 잘하고 있다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안종필은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을 차입해달라고 했다. 안종필은 책을 읽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며 출옥을 기다렸다. 동료들과 한방에 머물며 여러 얘기를 나눴는데, 어느 날, 동아투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 투위의 나갈 길이 더욱 어려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자유언론을 압살하고, 그것을 근원적으로 봉쇄하는 것이 유신독재 체제였기에 우리 싸움의 목표를 그 하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유신체제가 일단은 깨어지게 됐으니 앞으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싸우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투위는 언론인의 집단인 이상 다시 언론 현직으로 되돌아가서 펜과 마이크를 잡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투위 전원이 명예롭게 동아일보사로 복직해야 한다. 동아일보사에의 복직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겠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투위원들이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며, 특히 감옥에 있는 우리들이 밖에 나갔을 때에는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 자칫 오해를 받기가 쉬우며 그런 오해가 큰 일을 저지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언론문제를 생각하고, 나아가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며 감정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냉철한 이성에 의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다.”
박정희가 사라졌으니 세상은 달라질 거고, 동아투위도 싸움의 목표를 새롭게 잡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안종필은 출옥 후 언론 현직, 특히 동아일보사 복직을 최우선 목표로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석방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1주일이 지나도 2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오히려 이부영과 임채정이 구속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부영은 11월13일 윤보선 전 대통령 집에서 동아투위, 조선투위,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수호청년협의회 등 5개 단체가 발표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성명서가 빌미가 되어 계엄 포고령 1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임채정은 11월24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 공동 준비위원장을 맡았다고 해서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구속됐다.
이 소식을 들은 안종필은 달라진 게 없는 세상에 분통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쫓겨나고 감시받고 갇히면서도 엄혹한 시절을 견뎌왔는데, 박정희가 죽었으니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고 기대했는데, 순진한 생각이었다. 유신체제를 뒷받침한 기득권 세력의 뿌리는 깊게 박혀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되지 않았고, 구속된 양심수들은 풀려나지 못했다.
10·26 이후에도 석방 움직임이 없자 안종필은 동료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이 자식들이 우리를 감옥 속에 가두어 놓고 또 장난을 치고 있다. 지금 정권을 맡고 있는 자들도 옛날 수법을 꼭 그대로 써먹고 있다. 왜 남자답게 일을 시원시원하게 처리 못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우리를 인질로 삼아 놓고 또 무슨 정치적인 흥정이나 곡예를 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또 비극과 희생이 따르게 되고, 악순환이 되풀이될 뿐이다. 도대체 정치를 한다는 작자들이 멋이 없다. 속시원하게 툭 털어놓고 멋지게 정치를 할 수는 없을까.”
[참고자료]
◎ 동아투위, 『동아투위 자유언론운동 13년사』, 1987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2014, 다섯수레
◎ 김종철, 『폭력의 자유』, 2013, 시사IN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