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9년 5월 들어 장인어른이 자주 면회를 왔다. 장인 이만수는 이광자가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하고 몸무게도 많이 줄었다면서 침 맞고 한약을 먹고 있다고 했다. 장인이 면회를 올 때마다 안종필은 맨 처음 이광자의 건강 상태를 물었다. 둘째 아이 낳고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약국을 맡으면서 피로가 누적됐다며 관리 약사를 두면 어떨지 묻기도 했다.
장인은 하나밖에 없는 사위를 각별하게 아꼈다. 딸보다 사위와 속 깊은 얘기를 더 나눴다. 안종필이 감옥에 있는 동안 면회실을 가장 많이 찾은 사람도 장인이었다. 장모는 두꺼운 솜옷을 여러 벌 만들어 감옥 안으로 넣어줬고,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사위가 건강하게 돌아오길 기도했다. 장인 장모, 손아래 처남들 덕에 옥살이하는 안종필은 가족 걱정을 조금은 덜었을 것이다.
6월 초 서울구치소에 있던 동아투위 동료들은 흩어졌다. 6월8일 안종필은 홍종민, 김종철, 정연주와 함께 성동구치소로 이감을 갔다. 박종만, 안성열, 장윤환은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됐다. 성유보, 이기중은 9월에 영등포구치소로 이감됐다. 안종필이 이감을 간 성동구치소는 서울 가락동 남한산성 쪽 허허벌판에 서 있었다.
성동구치소 독방은 1.06평으로 양팔을 뻗으면 벽에 닿을 정도로 비좁고 갑갑했다. 서울구치소 독방은 문이 나무로 돼 있고 뺑끼통 뒤 철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볼 수 있었지만, 안종필이 이감한 성동구치소 독방은 쇠로 된 철문에 ‘식구통’(밥을 넣어주는 조그만 구멍)과 얼굴 높이의 쇠창살 얼개가 있을 뿐 사방이 꽉 막혔다.
좁고 갑갑한 성동구치소 독방, 합방 요구 발길질
이튿날부터 안종필과 홍종민, 김종철, 정연주는 함께 이감 온 대학생 10여명과 함께 감방 철문을 발로 차며 다른 사동으로 옮겨달라는 투쟁을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철문을 걷어차고 물건으로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김종철과 정연주, 홍종민은 학생들 못지않게 구호를 외치며 철문에 발길질했다. 안종필도 따라서 했다. 구치소 건물이 울릴 정도로 소리가 요란했다. 당황한 구치소 보안과장이 안종필에게 대화를 청해왔다. 보안과장은 동아투위 4명과 대학생 모두를 구치소 맨 앞쪽 사동(舍棟)으로 옮겨주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들은 만세를 불렀고 안종필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구치소 측은 앞쪽 사동 2층의 방 4개를 비워주었다. 1호실 안종필, 2호실 홍종민, 3호실 김종철, 4호실 정연주가 썼고, 각 방에 대학생 3명이 들어왔다. 방은 7~8명이 생활할 정도로 넓었다. 맨 앞쪽 사동이라 담장 너머로 바깥세상이 보였다. 무엇보다 대학생들과 함께 있어 좋았다. 안종필은 6월23일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성동구치소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창문을 열고 보면 큰 호수가 보이고 주위에는 과수원이 둘러싸여 있으며 과수원과 잇달아 목장이 있구나. 젖소가 20여마리 정도 보인다. 정말 한가한 농촌 풍경이다. 이런 곳이 서울시내에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믿기 어려울 것이지만…. 한 3년 전에 경기도 광주군이 서울로 편입된 곳이다. 일요일에는 수많은 낚시꾼이 호수를 에워싸고 고기잡이에 바쁜 한가한 시골이다. 그리고 초가집도 두 채가 보이는구나. (…) 아빠는 요즘 야구, 축구 등 운동을 많이 하고 바둑, 장기를 두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구치소에서 야구와 축구를 했다니…. 아들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안종필의 선한 거짓말이었다. 사동과 담벼락 사이에 가로 5m, 세로 30m쯤 되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운동했다. 주로 달리기를 했는데 김종철은 전속력으로 100바퀴를 돌았다. 안종필, 정연주, 홍종민이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김종철은 빨랐다. 특별한 운동이라면 정구를 했다. 맨땅에 금을 그어 경계를 나눴고, 네트도 없었다. 안종필과 홍종민, 정연주와 김종철이 짝을 지어 복식정구를 했는데, 라켓이 없어 손으로 쳐 넘겼다. 손으로 쳐도 재미나는데 라켓으로 치면 얼마나 재밌겠냐며 나가서 꼭 테니스를 하자고 서로에게 말했다.
고통을 속으로 감추고 활짝 웃는 남편에 느낀 짙은 고독
성동구치소로 이감된 지 사나흘 지났을까. 면회를 다녀간 아내가 편지를 보냈다. 6월12일자 편지는 이랬다.
“존경하는 당신에게 아내가 글을 보냅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습니다. 시간으로 따져 당신을 뵙고 온 지 불과 몇 시간이 지났겠어요? 푸른 옷을 입은 죄수 아닌 당신을 바라볼 때 이 땅의 정의가 무엇이며 진실이 무엇인가를 소리치며 누구에게나 묻고 싶습니다. (…) 약국에 들어서는 순간 슬픔이 터질 것만 같아 한동안 서성거렸습니다. 너무나 멀다는 구치소와 집과의 거리여서가 아니고, 당신 가까이서 위로와 고통을 함께 해줄 수 없음이 안타까워 서러워서 울었던 거예요. 서대문구치소보다 공기가 맑고 좋으시다는 말씀. 익혀 보고 왔지만 한 번도 괴롭고 답답함을 알려주지 않고 편하고 안정된다고만 하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짙은 고독을 느낄 때 가슴이 저려오다 못해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받습니다. 여보, 당신의 전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당신의 아내가 당신의 힘이 되어줄 수 없는, 하잘것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하고 살펴질 때 부끄럽습니다. 오늘만 해도 그래요. 보안과장실에 가서 우리 네 식구(※안종필, 홍종민, 김종철, 정연주 부인을 지칭) 인사드렸어요. 무척 너그러움이 있어 보입니다. 항상 위장할 줄 모르는 우리 식견으로서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 당신네 식구를 위해 정신적 위로를 최대한 좀 베풀 수 있었으면 하고 그런 의미로서 합방을 꼭 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 드렸어요. 확고한 약속은 해주지 않았지만 관심을 갖겠다고 그러면서 인간적인 가까움을 갖도록 하자고 합디다. (…) 순간순간 당신의 아픔을 같이할 수 없는 시간만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지껏 지나온 세월이 선량하게 착하기만한 우리들을 강하게 굳세게 다져지고 부디치라고 자꾸만 마찰을 일으키게만 만드는 것 같음을 느낍니다. 무섭지 않은 힘이 무섭게 보이려고 함을 압니다. 그러나 사랑합시다. 모두를 용서하며 관용합시다.”
몸이 아파서 남편을 한동안 만나지 못한 이광자는 이감 소식을 듣고 서울의 끝자락 성동구치소를 찾았다. 허허벌판에 자리 잡은 구치소, 좁디좁은 독방에 갇힌 남편을 보고 돌아온 이광자는 서럽게 울었다. 면회실 철망 너머로 마주한 남편은 공기가 맑고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아내 건강에 더 신경을 썼다. 이광자는 고통과 쓸쓸함을 속으로 감추고 활짝 웃는 남편에게 짙은 고독을 목격했다. 이광자는 6월13일에도 남편에게 편지를 썼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넘긴 민영, 예림 깊이 잠들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빠 얘기하면서 “우리 아빠는 옛날로 말하자면 선비야” 하는 민영이의 표현, “우리 아빠는 겉보기보담 마음이 멋져”하는 예림의 표현. 그럼 저도 한마디 하죠. “아빠는 겉과 속이 일치하는 선량한 지식인이었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무서운 힘이 밀어붙여 아빠를 투사가 되게 해버렸다고. 투사가 되어버린 아빠를 지켜보다 엄마도 슬픔을 잃어버렸고 오직 당당한 아빠의 뒷바라지를 즐겁게 하게 되었다”고 일러줍니다. 여보, 식사시간이나 잠잘 때 “아빠 건강하세요. 그리고 빨리 오세요” 하는 두 아들딸의 기도 소리가 들려옵니까? (…) 여보, 예림이가 아주 통통하게 많이 자랐어요. 다음 면회갈 때 어린이 대공원에서 찍은 사진 갖고 갈게요. 빡빡 깎은 민영의 모습 보여드릴게요. 얼마나 당신을 닮았는지, 정말 당신도 사진 보면 웃으실 거예요. (…) 어서 빨리 당신 오시면 얘들 모두 당신께 맡겨야겠어요. 두 얘들은 아빠만 빨리 돌아오면 엄마 약국 그만두시게끔 아빠한테 얘기하겠다면서 기다립니다. 당신 부담 느끼시죠. 그러나 모든 것 당신과 의논해서 할게요…”
아내의 편지는 이어졌다. 6월14일자 편지에는 아이들 소식과 함께 성유보·윤활식·이기중 재판 소식을 담았다. 두 번째 구속됐는데도 법정에서 당당하게 발언하는 성유보를 보며 남편이 꿈꾼 언론에 대해 조금씩 이해의 문을 열고 있었다.
“성유보씨 법정에 다녀온 날 집에 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두 번씩이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이렇게 빈약한 한 남자가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너무도 괴로워 울었던 겁니다. 당신이 법정에 서시던 날보다 더 애절하게 목이 메었습니다. 그날 옆에 있던 아라 엄마(※고 조민기 PD 부인)가 이렇게 말했어요. 예림엄마, 슬픈 연애를 한번 꼭 해야겠다고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아시겠죠. 같이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습니다. 청심환이라도 한 알 먹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무야 엄마(※성유보 기자 부인)한테 청심환을 한 알 갖다 드려야겠습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나약한 몸으로 카랑카랑 울리는 법정진술에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언론인의 참된 모습을 영원히 새겨두게 합니다. 의롭게 살겠다는 당신네들의 특권적 지위를 생각하게 되었으며 너무도 당당하고 진실한 표현에서 다시 한번 의식높은 차원을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편지 3통을 한꺼번에 받은 안종필의 가슴은 처절하고 쓰라리다 못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무엇한다고 여기까지 와서 아내를 고생시키나. 아내는 가족 생계를 책임지며 아이들까지 키우는데 나는 뭐했나. 자유언론이니 뭐니 하며 밖으로만 돌며 가족들에게 폐만 끼치고 살았지 않나. 아내에게 미안하고 자신에 대한 원망이 들었다.
항소심 재판부가 6월28일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박천식)에 배당되면서 안종필은 항소이유서와 씨름하며 초여름을 맞았다. 항소심 재판을 준비하며 8·15 때 가석방으로 풀려날 수 있다고 기대한 듯하다. 안종필은 당시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 8·15를 기다려보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항소심 공판은 그런 기대를 비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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