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이 유죄판결 내리자... 법정에 울려퍼진 '그 노래'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㉘긴급조치 9호 법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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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9일 1심 법원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안종필 등 7명에 대해 징역 1년 6월에서 2년 6월의 실형이 내린 이후 동아일보 해직기자 가족과 동료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9년 2월17일 4차 공판에선 안종필과 홍종민에 대한 변호인단의 반대신문이 있었다. 그날도 방청석은 초만원이었다. 책가방을 든 대학생도 많이 보였다. 황인철 변호사와 주고받은 문답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황인철: 동아투위는 왜 생겼고 무엇을 하는 단체입니까?

안종필: 자유언론의 수호를 위해 투쟁하는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의 모임입니다. 매월 17일에 월례회의를 갖고 유인물을 내고 있습니다. 매월 7일에는 상임위원회를 열어 중요한 일을 의결합니다. 우리나라의 언론은 1960년대 말부터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아 제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몸으로 투쟁하겠다고 결의했습니다. 우리는 1975년 3월17일 200여 폭도들에 의해 신문사, 방송국에서 쫓겨났습니다. 바로 그날 우리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동아일보사로의 명예로운 원상회복과 자유언론의 수호를 위해 투쟁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동아투위는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시민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아일보사의 광고해약 사태 때 보여준 민주인사들의 뜨거운 성원에 보답해야 합니다. 그간 우리 투위 위원들에 대한 구속 연행 수색이 잦았고, 임수진 아나운서는 결혼을 하고도 해외로 내보내지 않아 이산가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인철: 투위의 조직은?

안종필: 원래 114명이었으나 두 분이 별세해 지금은 112명입니다. 이 112명이 전체회의를 가끔 갖습니다. 우리가 쫓겨난 날인 17일, 매월 17일에 모여 점심을 함께하기도 하고 야유회, 고인에 대한 추도회 등을 갖는데 이것이 다 전체회의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투위에는 또 상임위원회가 있어 중요 정책을 결정합니다. 상임위원은 지금 14명입니다. 상임위원은 대개 각 국(局) 대표나 부(部) 대표 또는 입사 동기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집행부는 위원장과 총무 둘 뿐인데, 전체회의 또는 상임위원회의 결의사항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강제로 물러나 있을 뿐 우리는 기자입니다”

황인철: 동아투위의 활동 목표는?

안종필: 동아일보사로 명예롭게 복직하는 것을 최대의 활동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직을 위한 준비로 항상 취재하고, 메모하고, 자료를 수집해왔습니다. ‘10·24 민주인권일지’도 바로 그런 것이며, 안성열 동지가 쓴 ‘재야인사 402명의 10·17 국민선언서명’ 기사도 그런 것입니다. 이것은 기자라면 당연히 취재하고 써야 될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황인철: 생계는 어떻게 꾸려나갑니까?

안종필: 아내가 조그만 약국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의존해 왔습니다.

황인철: 10·17 유인물에는 ‘반체제 가요사건’이 기록돼 있는데 그런 것은 왜 실었습니까?

안종필: 우리는 기자입니다. 전 소설가, 전 법조인이 있을 수 없듯이 우리는 전 언론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론인입니다. 다만 잠깐 현장에서 타의에 의해 강제로 물러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기자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황인철: <동아투위소식>이 신문통신등록법 위반이라는데….

안종필: 우리 동아투위 유인물은 75년 3월17일 이후 한 달에 1회 이상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습니다. 우리 유인물은 그동안 경찰과 정보부원들이 그때그때 가져가서 상부에 다 보고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한 번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 유인물은 그 제목이 말해주듯 <동아투위소식>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곳에는 우리의 억울함과 부당한 현실이 정정당당하게 개진되어 있습니다. 우리 유인물은 우리가 언론인으로서의 의견을 말하는 것입니다.

황인철: 지금과 같은 긴급조치 아래에서도 자유언론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종필: 물론입니다. 긴급조치는 국가 위기 등 긴급사태에만 발동되어야 하는 인위적인 것이지만, 언론자유는 하늘이 내려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자유언론적 동물입니다. 따라서 자유언론은 긴급조치 이전의 것입니다. 구치소에 있어 보니 듣고 말하고 보고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양식 바로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듣고 보고 말하지 못하면 미치고 맙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언론이 보장되지 않으면 썩고 미치고 맙니다. 그러므로 긴급조치 밑에서도 언론의 자유는 제한될 수 없는 것입니다.

3월3일 열린 6차 공판에서 안종필과 동료들이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고, 법원 결정을 기다리면서 1심 재판은 중단됐다. 서울형사지법 제12부가 심리한 재판부 기피신청은 기각됐다. 서울고등법원에 항고했으나 기각당했고, 대법원 재항고도 4월30일 기각됐다. 2월 초부터 일주일마다 열린 1심 재판은 3월 초부터 4월까지 약 두 달 열리지 못했다.

감옥살이에서 편지를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4월 들어 편지가 잇따라 날아들었다. 몇 글자 안 되는 짧은 내용이라도 읽고 또 읽었다. 아빠가 없는데도 바르게 자라는 아이들이 대견하면서도 “아빠가 생각나 사진을 보았다”는 딸의 편지에 가슴이 저며졌다. 이광자는 외롭지 않다며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당신 아내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의 그 진실한 눈빛을 바라볼 때 미처 행복을 몰랐던 것 같아요. 진실은 역사가 언제나 입증해주는 것입니다. 항상 강한 정신력으로 견디어 봅시다.”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안종필에 도움 요청한 구치소 보안과장

그 무렵 서울구치소는 시끄러웠다. 대학생들은 며칠째 “도서 검열을 폐지하라” “합방에 보내달라”는 구호를 외쳤다. 구치소 당국이 일부를 징벌방에 가두며 강제진압하자 단식으로 맞서며 감방 철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학생들은 구치소 간부와 교도관들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단식과 항의를 멈추려 들지 않았다. 항의와 소란이 계속되자 보안과장은 안종필에게 사태 수습을 간청했다.

“안 위원장님, 학생들이 단식을 멈추지 않아 사고라도 난다면 제가 옷을 벗어야 합니다. 제발 좀 말려주십시오.” 안종필은 한참 생각한 끝에 “한번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보안과장은 구치소 안의 간이목욕탕에 학생 대표 몇 사람을 불러 안종필과 대화를 갖도록 했다. 안종필은 “도서 반입과 합방 문제는 내가 보안과장과 잘 의논해 볼 테니 단식을 푸는 것이 좋겠다”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위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결과를 지켜보겠습니다”라고 응답했다. 안종필이 그런 합의를 구치소 당국에 전하자 바로 이튿날부터 상당수의 도서가 ‘반입 금지’에서 풀려났다.

5월9일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안종필은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받았다. 홍종민과 안성열은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 장윤환은 징역 1년 6개월에 자격정지 1년 6개월, 박종만, 김종철, 정연주는 징역 2년 6개월에 자격정지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79년 5월11일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린 금요기도회는 '구속 언론인을 위한 밤'을 주제로 열렸다.

서울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한정진)는 “피고인들의 자백이나 유인물 등 증거에 의해 피고인들의 유죄는 확실하다”고 유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언론의 자유는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700만 인구가 그 나라의 공산화 이후 500만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에 비춰 우리도 더욱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 언제 어떤 형태로 캄보디아와 같은 참화가 밀려올지 모른다”고 판결문에 썼다.

그날 재판에서 안종필과 동료들은 재판부의 출퇴정에 기립하지 않았다. 재판장의 호명에도 응답하지 않고 앉은 자세로 선고를 받았다. 재판장이 유죄판결을 내린 순간 피고인석에서 노랫소리가 나왔다.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곧 돌아가리
자유 누리는 새 세계로…

정리(廷吏)들이 달려들어 제지했으나 안종필과 동료들은 노래를 계속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미국의 흑인들이 만들어 부른 찬송가였다. ‘오 자유’는 그치지 않고 대법정에 울려 퍼졌다. 노래는 마침내 끝났다. 7명은 방청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법정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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