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승리한 광장, 그 곳에 기자들이 있었다
[윤석열 탄핵 가결 순간과 국민·언론]
2030 여성들, 정치 주체로 급부상
기자들 "오늘 기록, 후대에 남는다"
현장서 전화로 기사 불러주며 제작
장혜원 광주일보 기자는 14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다. 전날 올라와 서울서 묵고, 이날 낮 12시쯤 여의도에 도착했다. 이 지역신문은 12·3 계엄 선포 후 기자 10여명으로 특별취재팀을 꾸리고 사태를 집중 조명해왔다. 이날 ‘호외’ 발행이 계획되며 광주 외 대구와 서울에도 기자들이 보내진 상태였다. 국회 코앞 현장부터 스케치하고 시민 인터뷰를 시도했다. 앞서 7일 취재 경험상 오후 3~4시면 중심부에선 움직이기도 어려워질 듯싶었다.
오후 5시, 국회에서 ‘가결’ 결과가 나왔고 곧장 현장 기사를 보내려 했다. 그런데 통신이 먹통이었다. 광주에서 각 지역 상황을 종합하던 사회부 ‘캡’과 간신히 전화가 닿았다. “말로 해!” 입사 1년이 안 된 올해 서른 살 기자는 ‘무용담’처럼 전해지던 과거 어떤 기자들처럼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이후 나머지는 파견 기자들이 서울 주재기자 오피스텔에 모여 함께 마감했다.
장 기자는 15일 통화에서 “처음 계엄 소식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는데 5·18 세대인 아버지가 ‘웃을 일이 아니다. 광주 기자인데 뭐라도 해야지’ 하며 집에서 쫓아내시더라. 호외 등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알던, 역사의 기록이란 신문 가치를 체감했다. 여러 반응을 접하며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구나, 해야 하는구나’ 느꼈다. 닥친 임무를 하느라 지난 10여일 제가 뭘 했는지 실감이 안 난다. 뭘 배웠고 반성해야 하는지 정리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14일 가결됐다. 수많은 과제, 할 일이 산적했지만 이날이 민주주의를 위협한 내란 시도를 막고, 다시 고쳐 쓰고자 한 시민·기자들에게, 헌정 자체에 변곡점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날 한 장소에서 분출된 수많은 목소리와 각자의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이날 낮 12시30분쯤 김정화 경향신문 기자도 국회 앞에 도착했다. 2018년 기자생활을 시작해 지난해 경향신문으로 이직한 그는 젠더 분야를 다루는 플랫팀에서 근무하다 9일 사회부 사건팀으로 임시 파견됐다. 한 주 전 주말 촛불집회엔 시민으로 참석했다면 이날은 일을 하러 간 셈이었다. 그는 분위기 전반이 “12일 대통령 담화가 불에 기름을 끼얹어서인지 지난주보다 사람들의 기운, 구호가 크고 응집돼 있다고 느꼈다”고 15일 통화에서 말했다.
사건팀에서만 3명이 투입됐고, 김 기자는 앞쪽 무대 주변을 취재했다. 호외 마감은 결과 발표 후 ‘30분 내’여서 국회 본회의가 시작된 오후 4시부턴 가결을 예상하고 미리 시민들을 인터뷰했다. 인터넷 상태 등 마감 상황이 좋지 않아 정돈 안 된 재료를 물어다 토스하면 안에서 정리해주는 식이었다. 사진은 송고가 거의 불가능했다. 김 기자는 “무대 쪽 프레스존에 수어통역사가 계셨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신나서 통역하는 게 인상적이어서 인터뷰를 요청했고 오늘(일요일) 기사를 썼다. 계엄 선포 당시 농인은 거의 전달 못 받았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특히 이번 집회에선 누군가 소외되지 않도록 의견을 반영하고 고민을 한 게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하철역에서 경향신문 호외를 든 시민들을 보며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현장에서 보고 듣고 기록한 게 후대에 남는다는 걸 절감했다. 언론을 비판하는 말도 들었는데 와치독의 역할에 대한 반성, 사명감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시민들의 수많은 의견 가운데 보수 정당의 역할, 정치 주체로서 ‘2030 여성’의 본격 부상 등은 향후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남긴 지점이다. ‘86학번 중년 여성’인 이재심(57), 김희원(57)씨는 이날 현장에서 “이토록 많은 시민들이 열망을 갖고 탄핵을 주장하는데 국민의힘은 정말 실망스러웠다. 그게 보수인가”라고 했다. 이어 “아들, 딸을 보면서 ‘얘들 괜찮나’, ‘너무 가치관이 없는 거 아냐’ 걱정도 했는데 이렇게 자기 주장과 철학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마웠다. 이들이 정치에 관심 갖는 계기가 된 게 윤석열이 잘한 일일 거 같다. 이들에 의해 상식적인 사회로 가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김선일(55) 씨는 “이번에 기성언론을 잘 못 믿겠어서 유튜브를 많이 봤고, 기성언론 중에선 MBC, 프레시안을 좀 봤다. KBS는 이제 잘 안 보게 됐다”면서 “헌법재판관이 6명 밖에 없는데 한 명만 반대해도 안 되지 않나. 오늘처럼 국민이 계속 지켜보고 압력을 넣어야 올바른 결론이 나오지 않을까. 언론이 그 과정에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경북 문경에서 상경한 주문주(27) 씨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도 언론이 ‘잘한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래도 이번 국면에서 나아졌다고 느낀 건 사실”이라며 “사람의 선의를 전 믿는다. 기자들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기사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양심이 있어도 억압이나 탄압으로 그걸 못 펼치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걸 펼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오전부터 천막을 치고 호외 2만부를 배포하는 등 시사IN은 2주 연속으로 ‘거리편집국’을 운영하기도 했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안팎에 기자 4~5인이 투입됐고, 김동인 시사IN 기자는 집회 현장취재와 관련해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다. 비편집국 구성원까지 모두 대응에 나서고, 회사에선 유튜브 생중계를 진행하는 등 전사적으로 분주한 날이었다. 계엄 선포 후 시사IN에선 편집국장과 대표이사가 통신사용을 자제하고 모처로 대피하는 일도 있었다.
김 기자는 “거리편집국은 창간 이후부터 저희 매체와는 뗄 수 없을 만큼 익숙했고, 국장은 물론 다들 너무나 당연하게 하자고 했다. 헌정이라는 예측할 수 있는 질서, 시스템을 다 정지시키려는 시도였고, 여기 자체가 중요한 현장이지 않나”라며 거리로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탄핵안 가결 순간을 시민들과 함께 하는 건 좋지만 “개운치 않을 것 같다”고 복잡한 심경을 전하며 “사실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당연한 수순을 못한 것 아닌가. 대통령이 그날의 선택으로 망가뜨린 게 너무 커서 그 후과를 우리가 치러야 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나 산적해 답답함이 오히려 크다”고 부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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