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마주한 미국 언론 3가지 흐름… 한국 언론 선택은

[노혜령의 Media Big Read]
(10) AI 시대 뉴스 산업의 진로

인공지능(AI) 시대 뉴스 산업은 어떻게 될까. 언론계에서 가장 궁금해할 질문이다.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AI 최전방 미국에서는 크게 3가지 흐름으로 갈리는 분위기다. AI로 새 저널리즘 양식을 개척하는 초대형 언론사들, 강력한 ‘존재 이유’를 찾아 세분화된 독자층의 커뮤니티 구축에 몰두하는 중규모 언론사들, 그리고 후원과 기부에 의존하는 소규모 지역 언론사들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18일 공개한 ‘Republicans flood TV with misleading ads about immigration, border’ 기사.

◇대형 언론사들, 비주얼 탐사보도 경쟁
워싱턴포스트(WP)는 8월18일, 생경한 포맷의 기사를 온라인에 게재했다. 수십 개의 선거 캠페인 광고 동영상들이 화면을 분할해 돌아가는 첫 페이지는 흡사 백남준의 미디어 아트 같다. 번쩍이는 스크린을 배경으로 정중앙에 한 문장이 도드라진다. “이민과 국경에 대한 오도된 공화당 광고가 TV에 넘쳐난다(Republicans flood TV with misleading ads about immigration, border).” 스크롤을 한 번 내릴 때마다 화면이 세 번 바뀌고 네 번째에 와서야 텍스트 기사가 시작된다. 이 기사는 올 1~6월까지 방영된 동영상 선거 캠페인 광고 중 ‘이민’을 언급한 745개를 분석한 결과다. WP가 자체 개발한 AI 툴 해이스태커(Haystacker)로 작성한 첫 기사다. 해이스태커는 동영상 파일에서 스틸 이미지를 추출한 뒤 화면에 등장하는 사물에 라벨을 붙이고, 자막을 단다. 맥락을 놓쳐 엉뚱하게 해석되지 않도록 기자들이 자막과 시각 정보를 수동으로 검증한 뒤 ‘역 이미지 검색’을 통해 영상 내용의 출처를 확인해 오정보를 잡아내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20%가 틀렸거나 오해를 야기하도록 교묘하게 편집된 사실을 밝혀냈다. 대상 745개 광고 중 700여개가 공화당 발(發)이었다. 공화당이 선거 캠페인 물량 공세를 통해 이민자 갈라치기를 하고 있다고 고발한 것이다.

◇블록버스터급 복합 장르의 기사 포맷
미국 대형 언론사들은 챗GPT 같은 범용 AI 앱이 아니라 디지털 뉴스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새 형식의 기사 개척에 나서고 있다. 디지털 포렌식과 데이터 분석 기술을 결합해 텍스트와 비주얼이 버무려진 소위 ‘비주얼 탐사보도’ 경쟁이다. 뉴욕타임스(NYT)는 2017년에 ‘비주얼 탐사(Visual Investigations)’ 팀을 만들었다. 벌써 퓰리처상 수상작만도 5개다. 머신러닝 훈련을 통해 위성사진, SNS 게시물과 동영상 등 수많은 공개 이미지들을 분석한 뒤 기자들 검증을 거쳐 숨겨진 진실을 찾는다. 예를 들어 민간인 거주지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쪽의 위성사진 등을 분석해 200개 이상의 전쟁용 폭탄이 투하됐음을 밝혀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파이낸셜타임스도 유사한 방법으로 ‘비주얼 탐사’를 강화하고 있다. AI 없이는 불가능한 포맷이다. 동시에 AI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기사들이다. 동영상, 이미지, 텍스트가 결합되고 AI 기술, 기자들 수작업, 각 분야 전문가들 자문이 어우러진 복합 장르의 블록버스터다. 위의 워싱턴포스트 기사 바이라인에는 제품 엔지니어 9명, 편집자 3명, 데이터, 디자인, 카피 편집자 각 1명씩 총 15명의 이름이 등장한다.

◇타임지(紙) 행로와 중규모 언론의 딜레마
이걸 할 수 있는 언론사는 전 세계 다섯 손가락 전후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규모 언론사들은 타깃층을 좁혀서 깊게 파고든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대표적인 예다. 세계적인 기업용 소프트웨어 기업 세일즈포스의 창업자 마크 베니오프는 지난 2018년 이 회사를 인수했다. 1990년대 400만 부를 넘던 유가지 발행 부수는 110만 부까지 쪼그라들었다. 타임의 구독 모델 변천사는 중규모 언론사의 디지털 적응이 얼마나 험난한지 보여준다. 타임은 2011년 일찌감치 하드 페이월(전면 유료 구독)을 도입했다. 성과가 없자 2015년 소프트 페이월(일정 건의 기사를 무료로 보여준 뒤 유료 구독으로 전환하는 방식)로 전환했다. 이후 2년여간 몇 건의 무료 기사 제공이 매출 극대화에 최적인지를 찾는 실험을 거듭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16년 하드 페이월로 회귀했다. 디지털 비즈니스의 ‘구루’ 베니오프의 인수 후 2021년에 소프트 페이월을 재시도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창간 100주년을 맞은 2023년 6월 페이월을 전면 폐지하는 강수를 뒀다. 당시 유료 디지털 구독자는 약 24만명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 1020만명, 월스트리트저널 390만명(배런스 등 자매지 포함 430만명), 워싱턴포스트 250만명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방문객의 콘텐츠 소비 행태, 사회경제적 속성, 인게이지먼트 수준 등의 데이터가 풍부해야 유의미한 분석을 통해 독자 수익화 변주가 가능하다. 어정쩡한 규모의 데이터로는 구독 매출도, 광고 유치도 교착상태에 갇히기 십상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오가는 커뮤니티 구축
타임은 구독과 트래픽에만 매달리는 전형적인 모델과 결별했다. 타임 레거시의 정체성과 AI 시대 신흥 수요의 교집합에 집중했다. 그래서 찾은 게 초개인화 AI 시대에 특정 관심사 중심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타임 100’ 프랜차이즈다. 독자들은 대중이 아니라 ‘개인’에 흥미를 느낀다는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1927년부터 ‘올해의 인물’을 선정해 온 레거시에 기반했다. 분야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을 뽑는 ‘타임 100’도 이 잡지의 오랜 자산이다. 타임은 이를 확장해 차세대 리더를 선정하는 ‘넥스트 타임 100’과 인공지능, 헬스케어, 기후변화, 엔터테인먼트 등 분야별 타임 100도 신설했다. 아프리카, 중동 등 지역 확장도 병행하고 지면과의 연계를 강화했다. 2022년 본격화된 이벤트 수는 그해 10개에서 2023년 27개로 늘었다. 매출은 매년 70% 이상(미국 시장 기준) 증가하고 있다. 페이월 폐지로 구독 매출은 줄었지만 이벤트 스폰서 덕분에 광고 매출은 증가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한다. 여기에 AI 기반 이벤트 및 커뮤니티 관리 앱인 비자보(Bizzabo)를 붙였다. 재정비한 브랜드 정체성의 효율을 높이는데 AI 투자를 집중하는 방식이다. 분야별 ‘덕후’들을 위한 다양한 패키지를 만들고, 이들과의 관계 구축이 필요한 광고주를 매칭하는 것이다. AI 시대에 희귀해지는 충성독자를 결집해 ‘규모’의 핸디캡을 극복하자는 전략이다.

◇후원과 기부로 먹고사는 소규모 언론사들
미국의 전체 카운티(한국의 자치구에 해당) 중 뉴스 매체가 1개 이하인 곳이 절반을 넘는다. 소위 ‘뉴스 사막화’ 현상이다. 그 예외 지역이 있다. 도시이자, 카운티인 샌프란시스코다. 인구는 약 80만명. 영등포구와 구로구를 합친 정도지만 뉴스 매체는 무려 27개다. 이 지역의 뉴스 유료부수 역시 하락세인데도 말이다. 실리콘밸리를 끼고 있는 지역적 특색 덕분이다. 고학력 부유층이 많고, 혁신 생태계 핵인 만큼 제도적 갈등에서 나오는 논란이 들끓는다. 이해관계도 엇갈린다. ‘나를 대변해 주는’ 다양한 뉴스의 수요가 많고, 기부액도 풍부한 이유다. 매출 70~80%를 기부금에 의존하는 10~20명 전후의 초미니 매체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팬덤에 휘둘려 재정이 불안하다. 부자들이 돈을 다 대기도 한다. 벤처 캐피털리스트인 마이클 모리츠가 2012년에 출범시킨 더스탠다드는 11만~17만달러의 연봉을 제시하며 유능한 기자들을 끌어모아 시의 감시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다만 그의 반대파들 사이에서는 모리츠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언론을 동원하고 있다며 편집 독립성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기부자가 사망하면 매체가 문을 닫기도 한다. 다양성은 높지만, 지속 가능성이 낮다는 점이 이 모델의 최대 약점이다.

◇뉴스 사막 없는 한국 언론의 역설
한국에도 뉴스 사막화 현상은 없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2022년 현재 신문사업체는 총 5700여개다. 종이, 인터넷, 지역신문 모두 증가세다. 환영할 만한 현상일까? 쩐의 전쟁으로 상징되는 AI 시대에 ‘규모의 경제’ 원리는 뉴스 산업에서도 강화됐다. 탄탄한 국가 보조 시스템과 세계 최고의 언론 신뢰도 및 유료 구독률로 부러움을 사는 북유럽 미디어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분산된 지역신문 구조가 특징이었던 북유럽 언론사들은 최근 몇 년간 집중화로 돌아섰다. 1등 뉴스 기업 십스테드(노르웨이)는 물론이고 2등 보니에뉴스(스웨덴)도 국경을 넘나드는 인수합병(M&A)을 지속해 현재 유럽 12개국에서 전국지 3개, 지역 일간지 47개, 잡지 20개, 전문지 15개를 운영 중이다. 스웨덴 내 점유율은 50%를 넘어섰다. AI 기술에 투자를 지속하고 투자금을 회수하려면 규모를 키우지 않고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북유럽(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3국 기준) 인구는 2000만명이다. 인구 5000만명이라는 규모의 한계 속에서 우리 국민들이 AI 시대의 고품질 뉴스 서비스를 누리려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고민할 대목이다. 과도한 집중은 다양성을 해치지만, 과도한 다양성은 품질을 떨어뜨린다. 규모의 경제에서 더욱더 멀어지는 산업 구조, 정파주의 이외의 다른 차별화는 찾기 힘든 전략 경영의 부재. 이런 숙제를 푸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 한,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AI 기술 시대에 어정쩡한 투자가 성공으로 이어지긴 힘들다. 국내 언론은 미국에서 벌어지는 3개 그룹화 현상 중 어디로 가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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