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플랫폼이 헐리우드 혁신 이끌었듯 'AI시대 뉴스'도 틀 깨야

[노혜령의 Media Big Read]
(6) 헐리우드 위기 역사가 뉴스 산업에 주는 인사이트

“한국의 디즈니가 되겠다”. 중앙그룹의 스튜디오 SLL은 지난 5월 이런 비전을 밝혔다. 게임사인 넥슨, 디지털 플랫폼인 네이버와 카카오, 엔터테인먼트 기업 CJ E&M까지 국내 온갖 종류의 미디어 기업 롤모델은 디즈니로 수렴된다. 그런 디즈니가 100주년을 맞은 올해, 최악의 위기에 몰렸다. 배우 박서준의 캐스팅으로 떠들썩했던 최신작 ‘더 마블스’는 마블 시리즈 역사상 최악의 실적을 기록 중이고 회사 주가는 2021년 대비 반토막 났다. 헤지펀드 3곳이 100년 우등생의 ‘후진 경영’을 고쳐 잡겠다며 이사회 자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비용절감’ 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OTT 시대에 걸맞게 구조 자체를 바꾸라고 압박한다.

미디어 기업이 플랫폼 파워를 잃었을 때

신기술 플랫폼이 헐리우드 스튜디오들을 위기에 몰아넣은 게 처음은 아니다. 뉴스산업의 중심 수익모델은 1800년대 후반 ‘대량 생산’ 체제 하에서 ‘광고 플랫폼’으로 확립된 이후 인터넷 출현 전까지 큰 변화가 없었지만 헐리우드는 달랐다. 영화산업도 원래 뉴스처럼 콘텐츠 제작에서 유통과 플랫폼(극장)까지 수직계열 구조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 전후 시작된 TV 보급과 극장 겸업 금지로 플랫폼 파워를 잃으면서 암흑기에 빠졌다. 콘텐츠 제작자로 축소된 것이다. 타개책은 차별화였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TV에서는 볼 수 없는 콘텐츠’ 포맷으로 내놓은 게 블록버스터 장르다. 197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죠스’가 시초였다. 죠스는 소재, 스토리 전개, 카메라 워킹, 특수 효과, 사운드뿐 아니라 마케팅과 배급도 새로웠다. 황금시간대 TV 광고, 티셔츠와 모형 상어 같은 상품, 원작 소설 동시붐업 등 공동(tie-in) 마케팅도 모두 이때 처음 시도됐다. 전국 대규모 동시 개봉을 뜻하는 와이드-릴리즈도 죠스가 시발이었다. 모든 면에서 TV와 완전히 차별화된 이 방식은 대성공을 거뒀다. 압도적 콘텐츠 파워를 앞세운 덕에 다양해진 신기술 플랫폼을 상대로 협상력을 높일 수 있었다. 특히 극장 개봉→홈비디오→케이블TV→공중파 방송 순으로 시차를 두고 여러 플랫폼에 콘텐츠를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멀티-윈도(multi-window) 수익 모델로 헐리우드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래픽① 참조).

마블 시리즈 성공 방정식에 균열 내는 OTT

하지만 블록버스터가 나올 때마다 마케팅 수위는 높아졌고 비용은 한없이 부풀어 갔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진화한 게 시리즈물이다. 특정 세계관과 캐릭터로 고정 팬덤을 확보하면, 영화 개봉 때마다 새로 인지도를 쌓느라 투입하는 마케팅 비용을 줄이면서도 흥행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그 최고의 요리사가 디즈니였다. ‘토이스토리’, ‘겨울왕국’ 같은 애니메이션의 창조자 픽사를 2006년에, 히어로물의 최강자 마블을 2009년에, 스타워즈와 인디애나존스의 고향인 루카스 필름을 2012년에 차례로 인수했다. 대형 IP(지적재산권) 시리즈물을 앞세운 프랜차이즈 전략으로 디즈니 왕국은 번창했다. 이 성공가도에 다시 균열을 낸 게 신기술 플랫폼 OTT다. 코로나 시대 OTT는 경쟁의 축을 ‘양’으로 바꿨다. 극장 개봉이 어려워진 디즈니는 코로나 시기에 무려 8편의 마블 콘텐츠를 OTT에 쏟아내며 넷플릭스 추격전을 벌였다. 멀티-윈도 모델에 맞게 진화한 콘텐츠를 OTT의 양적 경쟁판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마블 영화는 총 33편으로 불어났고 과도한 투자비는 부채로 쌓였다.

플랫폼 변화는 소비패턴을 바꾸고 콘텐츠 혁신을 촉발

픽사가 약 2600억원을 투입해 제작한 대작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의 흥행 패턴도 OTT로 달라졌다. 디즈니+의 국내 런칭 이전에 극장 개봉된 ‘겨울왕국2’는 29일 만에 최종 관객수(1374만7792명)의 90%, 48일 만에 99%를 동원했다. 승부는 한 달 안에 내고 한 달 반 남짓이면 극장 수명을 다하는 블록버스터 패턴의 전형이다. 시리즈가 아닌 오리지널 스토리 ‘엘리멘탈’은 사뭇 달랐다. 개봉 두 달(60일)이 돼서야 최종관객(11월19일 기준 723만6547명)의 90%를 달성했고, 99%를 모으는 데 석 달(89일)이나 걸렸다. 전례 없는 뒷심으로 손익분기점을 넘은 덕에 개봉 초기 붙었던 ‘픽사 역사상 최악의 망작’ 딱지를 떼고 괜찮은 히트작에 등극했다(그래픽② 참조). 더 큰 반전은 지난 9월 디즈니+에 풀리자마자 올해 시청시간 1위에 오르며 구독자 확대의 일등공신이 됐다는 점이다. 덕분에 1조5000억원씩 기록하던 디즈니+의 분기 적자가 5000억원으로 줄었다. 가족 관객의 애니메이션 관람 습관 변화가 몰고 온 결과였다. OTT 때문에 가족 관객을 극장으로 유인하는 게 더 오래 걸리고 힘들어진 것이다. 디즈니는 블록버스터 전략 재점검에 들어갔다. OTT 시대에 최적 제작비를 하향조정할 필요는 없는지, 히트작 정의는 무엇인지 재정립할 필요가 생겼다. 극장에서 TV로 이동이 블록버스터 장르를 탄생시켰듯, 뉴 플랫폼 등장은 소비패턴을 바꾸고 이는 결국 콘텐츠 혁신을 불러온다.

뉴스도 차별화로 IP 기반의 수익모델 모색이 필요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뉴스 산업도 플랫폼 파워를 되찾을 확률은 더 낮아졌다. 뉴스 기업들의 정체성도 올드 헐리우드처럼 ‘콘텐츠’ 제공자로 전환될 공산이 커졌다. 그런 맥락에서 뉴스 산업이 헐리우드 위기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첫째, 차별화가 중요해졌다는 점이다. 콘텐츠가 차별화돼야 IP기반의 협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생성형 AI 플랫폼의 경쟁력도 저작권이 있는 질 높은 데이터 확보가 좌우할 것이란 예측이 많다. 양질의 차별화된 정보 및 관점을 녹여낸 뉴스 패키지를 가져야 뉴스기업의 AI 플랫폼 협상력이 높아진다. 다른 언론사들과 기사가 비슷해야 ‘객관적’이라는 생각은 대량생산시대 수직계열의 과점구조에서만 통용된다.


둘째, 이중 시장(dual market) 구조의 선순환이다. 콘텐츠 상품은 제작비 투자에 따라 품질이 좌우된다. 투자비를 회수하려면 최대한 많이 팔거나 다양하게 변조해 파는 수밖에 없다. 즉 규모의 경제, 규범의 경제 추구가 불가피하다. 너무 많은 플레이어들이 양적경쟁을 벌이는 시장에서는 투자 회수가 구조적으로 어렵다. 자유경쟁 시장보다 과점시장에서 콘텐츠 질이 더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신기술은 지속적으로 시장진입 장벽을 낮추고 새로운 진입자를 양산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산업은 이중시장 구조를 띤다. 거액의 투자비가 드는 상업영화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메이저 스튜디오들의 과점, 예술영화는 자유경쟁 시장으로 구분된다는 뜻이다.

자유경쟁 시대에 이중 시장 구조가 주는 이점

상업영화는 수직적 품질(투자비) 경쟁, 예술영화는 수평적 취향 경쟁을 벌인다. 예술영화는 유의미한 시장 점유율 확보로 안정적 수익을 지속하기는 힘들지만, 실험적 콘텐츠로 틈새 관객층의 색다른 취향을 공략한다. 덕분에 이중시장 구조에서 예술영화는 관객들의 취향 변화를 최전선에서 탐지하는 R&D 센터 역할을 한다. 망해가던 히어로물 베트맨을 새 문법 접목으로 소생시킨 인물은 실험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블록버스터 무경험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었다. 2005년 그가 메가폰을 잡은 ‘베트맨 비긴즈’는 낡은 블록버스터를 재생시켜 히어로물의 부흥을 이끌었다. 새로운 세계관(관점)이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맞아 떨어질 때 패러다임은 변한다. 그걸 놓치지 않아야 콘텐츠 경쟁력이 지속된다. 과점의 기득권만 있는 산업에서는 힘든 일이다.


신기술로 뉴스시장의 진입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뉴스시장에도 수천 개 이상의 언론사와 유튜버가 난립한다. 이런 구조가 인간 본성인 편향적 사고와 결합돼 ‘가짜뉴스’ 홍수를 만들어내고 전반적 뉴스 품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국내에 메이저 스튜디오 역할을 하는 뉴스 기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헐리우드식 이중 시장의 선순환이 그 솔루션이 될 순 없을까. AI가 디지털 빅데이터의 패턴을 찾아 뉴스 수집을 돕거나(로이터) AI로 소셜 미디어를 스캔해 어떤 사건이 부상하는지 탐지(AP)하는 일부 언론의 기술 투자가 그 가능성의 단초일 수도 있다.

헐리우드식 경영에서 인사이트를 얻어야 하는 이유

AI는 지난 30년간 겪었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향후 3년 안에 뉴스산업에 몰고 올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생성형 AI는 정보를 재조합해 스토리를 만듦으로써 ‘기사’라는 저널리즘의 기초 단위부터 해체할 수 있다는 우려도 그 중 하나다. 신기술 플랫폼은 소비 패턴을 바꾸고 콘텐츠 포맷의 변화까지 끌어낸다는 걸 헐리우드가 앞서 보여줬다.


없던 상황이 펼쳐지는데 기존 저널리즘 로직 안에서만 답을 찾으면 한계에 부딪친다. 차별화된 IP기반의 수익모델, 콘텐츠 포맷의 지속적 실험, 스타 시스템(특유의 관점으로 팬덤을 만드는 스타 저널리스트의 전략적 활용), 포트폴리오 관리 같은 헐리우드식 경영에서 힌트를 얻는 것도 방법이다. 뉴스판 메이저 스튜디오가 나와야 백가쟁명의 경쟁 시장 속에서도 고품질 뉴스가 혁신되는 이중 시장 구조가 가능하다.

노혜령 ㈜프레스온 대표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