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달은 미국 언론사의 잔혹기였다. 6월에는 워싱턴포스트(WP)와 CNN 최고경영자(CEO)가 닷새 간격으로 잇달아 사퇴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의 인수 이후 300만명을 찍었던 WP의 구독자는 250만명으로 줄었고 올해 약 1300억원(1억달러) 적자가 전망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좌파 편향 딱지를 떼고 중립 이미지를 회복하겠다며 호기롭게 CEO에 취임했던 CNN의 크리스 릭트는 1년여만에 전격 해임됐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타운홀 미팅 생중계 등 중립을 향한 성급한 ‘우클릭’이 직격탄이었다. 앞서 5월에는 한때 7조4000억원의 몸값을 자랑하던 디지털 총아 바이스 미디어가 파산을 신청했다. 폭스 뉴스가 개표 부정 음모론 보도 소송을 1조원이 넘는 사상 최고액의 합의금으로 무마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때였다.
디지털형 CEO들은 수익화 실패, 기성 CEO들은 팬덤 독자라는 늪에 빠졌다. 그 늪에 너무 깊이 발을 담근 폭스 뉴스도, 그 늪에서 벗어나려던 CNN도 결국 정치 극화의 소용돌이에 갇혔다. 이런 총체적 혼란 속에서 무엇이 신호이고 무엇이 소음일까.
객관성 저널리즘의 기준
CNN의 릭트 전 CEO는 ‘중립’을 객관성 확보의 방편이자 시청자 외연 확대의 전략으로 삼았다. 이게 패착이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저널리즘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객관과 주관의 이분법은 철학, 심리학은 물론 사회과학에서도 폐기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관점을 갖게 된다. 객관은 관점을 초월(view from nowhere)한다는 뜻이고 현실 사회에서 불가능한 개념이다. 20세기 저널리즘은 그래서 상반된 관점을 균등하게 소개하는 중립을 객관의 실행기준으로 삼곤 했다.
이해 관계와 관심사가 엇비슷한 중산층이 ‘대중’이었던 시대에는 ‘객관’을 이렇게 눙치는 게 먹혔다. 관점과 이해관계가 파편화된 디지털 시대에는 이런 방식으로 객관을 묶어내기가 어렵다. 이제 몇 가지 관점을 단순 나열하는 기계적 중립은 객관으로 수용되기 어렵다.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개념이 부상하는 이유다.
간주관성과 디지털 기술
간주관성 혹은 상호주관성은 각자의 주관이 부딪치면서 생기는 공통 부분을 말한다. 검증된 자료에 기반해 내린 해석이 논리적 정합성을 갖고 있다고 다수가 인정하면, 그걸 객관적이라고 수용해주는 것이다. 뉴스 산업도 중립의 강박보다는 팩트 기반의 논리적 정합성을 갖고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관점의 보도를 추구하는 편이 시대 상황에 맞을 수 있다. 뉴스 산업의 역사를 통틀어 정보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며 가치의 우선 순위를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는 늘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대중 매체 시대에 통용됐던 ‘객관’이라는 환상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산업 혁명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던 초기에도 새로운 중산층의 관심사와 관점 역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졌다. 당시 신문들은 여기에 부응해 깨알같은 정보를 빽빽이 나열했다. 그러다 부가가치가 높은 뉴스는 단순 나열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일부 언론사들이 ‘관점’을 제시하기 시작했고 대도시의 강력한 파워를 가진 신문으로 거듭났다. 이들이 20세기 대도시 중심의 과점 언론을 형성했다.
지금은 디지털 데이터 분석을 통해 독자들의 다양한 관점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어느 지점에서 가장 큰 공통분모를 이루는지 정확하고 빠르게 파악하는 능력을 얻는 게 디지털 시대 고품질 뉴스를 정립하는 데 중요하다. AI나 챗GPT 활용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 문제는 ‘중간’에서 보도하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제시한 관점이 시대정신에 부합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중립에 대한 강박은 디지털 시대 뉴스 혁신을 추진하는데 자칫 독이 될 수 있다. 릭트를 비판했던 어느 기자의 표현처럼 중간에는 독자가 없을 공산이 크다.
연성(soft) 뉴스발 콘텐츠 혁신
뉴스 산업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곡점은 대중지(penny press)의 등장이었다. 1830년대 대중지가 처음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언론은 ‘정파지(party press)’의 시대였다. 당시 신문들 주 수입원은 구독료였다. 정치적 팬덤에 기대 구독료를 받고, 뒷돈을 챙겨주는 특정 정파의 나팔수가 되는 식으로 부족한 수입을 채웠다. 따라서 내용은 정치 사설이 대부분이었다. 철저히 경성(hard) 뉴스 중심이었고 주 독자층도 투표권을 가진 유산계급의 남성이었다.
그런 정파지의 시대를 마감하고 대중지의 시대를 연 뉴욕 선(Sun)의 창업자 벤자민 데이는 ‘연성 뉴스’ 혁신부터 시작했다. 대도시 중산층이 탄생하고 이들의 관심이 이동하는 것을 포착한 그는 독자층을 여성, 아동, 매일 출퇴근하는 노동자로 확대했다. 경제, 문화, 엔터테인먼트, 가정 등으로 뉴스 보도 범위를 확대했다. 지금은 당연한 소리 같지만, 당시 저널리즘 기준에서는 ‘뉴스가 아닌’ 내용이 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디지털 전환기 뉴욕타임스(NYT)의 성공 전략이자 WP의 실패 지점이기도 하다.
번들링 자체의 다양화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내부 역량으로는 빠르게 확보하기 어려운 게임, 상품 리뷰, 오디오 저널리즘, 스포츠 등 비뉴스 연성 정보를 추가해 가면서 독자들이 원하는 버전의 다양한 번들링구독을 실험해 온 NYT와 달리, WP는 정치 뉴스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이언 CEO에게 일임하고 손을 뗐던 베조스가 올 1월 다시 뉴스룸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이런 전략을 수정하기 위해서로 보인다. 새 CEO를 물색 중인 베조스는 미 도시 전역의 독자 의견을 수렴하는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시작했고, 진행 상황을 직보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뉴스를 읽지 않는 독자들을 어떻게 끌어들일지가 고민의 초점이라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산업 혁명기와 현재의 차이는 번들링 자체의 다양화에 있다. 인쇄 기술하에서 신문 번들링은 단일 가격의 단일 상품이었지만, 디지털 번들링은 독자 관심사, 이슈별 이해 정도, 지불 의향에 따라 다양하다. 그러려면 원재료가 더욱 풍부해야 한다. 그 시작은 팬덤을 들끓게 할 경성뉴스가 아니라 연성 뉴스다.
뉴스를 위한 비즈니스와 비즈니스를 위한 뉴스
마틴 배론 전 WP 편집인은 곧 발간될 회고록에서 베조스의 비용관리 대리인이 에디터들을 ‘간접 직원’으로 분류했다고 밝혔다. 상품(기사)을 생산하는 기자들은 ‘직접’ 직원이지만 데스크들은 ‘간접’ 인력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간접 인력은 늘어나선 안 되는 관리 대상이다. 배론은 이런 관리 기준을 우회하기 위해 에디터가 필요할 때 ‘애널리스트’ ‘전략가’ 같은 타이틀로 구인했다. 뉴스 비즈니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베조스의 한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뉴스 상품의 투자 방정식은 일반재 손익 분석처럼 단순하지 않다. 지나치게 단선적 효율을 추구하면 진부해지고, 신선한 혁신도 공감이 없으면 독자들의 외면을 받는다. 시대 정신을 꿰뚫는 콘텐츠는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비즈니스에 경쟁력을 가져다준다. 이런 판단은 데이터 과학보다 예술에 가깝다. 이런 난제 때문에 탁월한 기업가도 뉴스산업에서는 중도 탈락하는 사례가 많다.
벤자민 데이도 인쇄공 출신의 기업가였다. 그는 대중지 중심으로 재편되는 뉴욕 신문 시장 격변기에 수익성이 타격받자 창업 5년 만인 1838년 회사를 매각해 버렸다. 정작 그가 발명한 대중지로 신문왕이 되고 저널리즘 역사를 만든 사람은 저널리스트 출신의 기업가 조셉 퓰리처와 랜돌프 허스트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저널리즘 수호를 목표로 하는 NYT가 디지털 역량 부재라는 치명적 약점을 뚫고 순항하는 반면 이커머스 플랫폼의 제왕 베조스의 WP는 주춤한다. ‘뉴스를 SNS로 보는’ 유통 혁신의 주인공 메타(옛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는 뉴스에서 손을 떼고 있다. 바이스 미디어가 파산한 근본적 이유도 저널리즘 구현이 먼저가 아니라 펀딩으로 기업 가치를 높여 매각하려는 스타트업의 전형적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이다. 고품질 저널리즘 구현을 위해 돈을 버는 것과 돈을 벌기 위해 뉴스를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미국의 디지털 혁신 현장이 보여주고 있다.
노혜령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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