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장면들에 대한 의도적 기록
많은 투쟁이 숫자로 기억된다. 몇 년간의 복직 투쟁, 몇백일의 고공 농성, 몇십일의 단식.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투쟁 또한 1842일의 광화문농성으로 회자된다.시간의 길이는 투쟁의 절실함을 어느 정도 드러내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지루한 하루를 견뎌냈을 사람들의 피로와 땀내, 잦은 막막함과 종종 찾아오는 연대의 환희와 같은 지난 시간의 구체적 경험이 그 숫자에는 없다. 그 시간을 언론도 보도하지 않는다. 보도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알 수 없고, 과정을 삭제한 결과 중심의 보도는 단지 싸움의 승패만을 알릴 뿐이다. 여기에는 언론의 습
적대의 시대 언론의 역할
2022년 8월,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와 이코노미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43%가 10년 내 미국에서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쩌다 이렇게 많은 미국인이 내전을 걱정하게 된 것일까?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따르면 그 주된 원인은 미국 정당정치의 양극화에 있다. 특히 1990년대 공화당 지도부였던 뉴트 깅리치의 극단주의가 시작이었다. 깅리치는 민주당을 항상 부정적으로 묘사하도록 공화당원들을 독려했을 뿐만 아니라, 하원의장이 된 이후에는 아예 민주당과 타협불가를 방침으로 정했다.깅리치 이후
신문 수익모델과 온라인 뉴스 페이월
저널리스트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비즈니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전통적인 저널리스트에 대한 설명은 유명한 언론인 조지프 퓰리처의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조판을 가르치고 경영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저널리즘 학교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저널리즘은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넘어 반상업적이어야 하며, 오히려 필요하다면 비즈니스를 희생하며 사회적 지식과 문화를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 뉴스 제작을 위한 기술에 무지하고 수익 구조에 신경 쓰지 않는 저널리스트가 가능할까?워렌 버핏은 1
과거사에 대해 일본은 사과하지 않았다?
내가 한국에서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왜 일본은 사과를 하지 않는가?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같은 과거사에 대해 왜 사과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한번도 안 한 건 아닌데라고 답하면 가끔 그럴 리가 없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해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 듯하다. 사과는 했지만 그걸 부정할 만한 일본 정치인의 발언이나 태도 때문에 사과를 못 받은 것처럼 느낀다라고 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사과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해라고 되풀이하면 일본 쪽에서도
영화제가 영화상영회가 아닌 이유
필자는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Community Biff)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관객이 직접 상영 프로그램을 기획하거나 다양한 부대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행사인데, 영화 친절한 금자씨를 상영하고 이후 박찬욱 감독과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에 대한 관객 독서 토론을 진행하거나 지역 주민들과 연계해 함께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기도 했다. 동네방네 비프는 영화제가 지역민의 생활 공간 거점을 직접 찾아가는 행사다. 기존 해운대나 남포동 같은 곳을 벗어나 범어사, 유라리 광장, 차이나타운 등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과의 대화…
'신(神)'이 만약 '사용자'라면
어떤 노동자가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노동위원회에 해고가 부당하다며 구제신청을 냈다. 다행히 노동위는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해고가 부당하니, 즉시 원래의 직으로 복직시키라는 이른바 원직복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 판단에는 전제가 있었다. 바로 회사가 그동안 프리랜서로 취급해왔던 그녀가 사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법률적 판단이었다. 그러니 입사 당시부터 근로자라고 판명난 그녀가 돌아갈 자리는 프리랜서가 아니라 정규직 근로자일 것이다.그런데 회사는 그녀를 정규직 근로자가 아닌 프리랜서로 복직시켰고 근로계
못 하는 걸까, 안 하는 걸까
근사한 재즈 바와 달콤한 튀르키예 간식이 있는 곳. 익숙한 풍경에 내가 한창 이태원 골목을 쏘다니던 딱 그 또래 청년들이 쓰러져 있었다. 심정지 인원만 수십에 달한다는 속보를 봤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언론에서 사망이 아닌 심정지라고 하니 기다려보자라는 말들이 오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현장에서 심정지로 분류된 환자 대부분 사망판정을 앞두고 있다는 걸 사회팀 기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마음을 이태원에 보낸 채 뜬눈으로 밤을 샜다.새벽 내내 언론은 참혹한 참사현장을 빠르고 생생하게 전달했다. 빠르고, 생생해선 안 될 것들이었
안다만의 회색바람까마귀
2004년 12월26일,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15만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 쓰나미는 리히터 규모 9.0으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했다. 피해를 본 나라만도 인도부터 베트남까지 12개 국가였으며, 그 물결이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에 닿았을 정도였다. 이 참사로 북반구의 매서운 겨울을 피해 따뜻한 동남아시아에 여행을 왔던 관광객들도 속절없이 죽어갔다. 재난은 TV를 통해 실시간 중계되었고, 희생자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호명하며 초혼했던 시기였다.그러나 이 쓰나미에서 재산을 잃었어도 목숨은 부지한 사
11월 중동이 뜨거운 두 가지 이유
11월 동안 거대한 국제 이벤트가 두 개나 열린다. 하나는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이다. 명실상부 올림픽보다도 더 큰 지구촌 스포츠 축제다. 손흥민과 김민재를 필두로 한국이 역대 3번째 조별예선 통과가 가능할지 기대감에 부풀었다.또 다른 이벤트는 지난 6일 시작해 2주차 진행 중인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다. 1995년을 시작으로 매년 개최해 올해 27번째다. 전 인류가 책임지고 협력해 해결해야 하는 기후위기를 유엔당사국과 기업, 시민사회가 모두 모여 협의하는 매우 중대한 자리다. 2015년 21번째 당사국총회에서 파리협정
공공임대주택 예산 5조7000억 삭감? 반드시 막아야
최근 윤석열 정부는 2023년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전년도 대비 5조7000억원 삭감하는 예산안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일 공공임대주택 예산 6993억원을 보전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5조원 삭감하자는 말과 다름없어, 정부 예산안과 도긴개긴이다.3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반지하 참사를 두 거대 양당이 모두 까맣게 잊은 모습에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공공임대주택이 아닌 민간 주도 개발을 활성화하고 종부세법인세 등 재벌과 다주택자의 세금을 감면하는 조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