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중요한 기능은 이미 벌어진 잘못의 진상을 밝혀, 다시금 비슷한 잘못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역할이 하나 더 있다. 특정한 문제나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막는 것이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사건을 어떻게 취재하느냐고, 도대체 어떤 팩트를 건져내야 그런 ‘예방적 저널리즘’을 실천할 수 있느냐는 볼멘소리가 현장에서 터져 나올 듯하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사건·사고는 표면적이지만, 그 이면에 계속 비슷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있고, 그것을 저널리즘 문법에 맞게 표현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할 뿐이다. 대개는 문제가 터지기 전에 미리 신호를 보내는 전조 현상도 있다. 그걸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굳이 언론의 예방적 기능을 강조한 이유는 트럼프의 재집권에 따른 윤석열 정부의 외교가 걱정돼서다. 트럼프에게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윤석열 대통령은 협상하기 너무나 좋은 상대일 것이다. 상대의 체면만 살려주면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이다. 마침 방위비 분담금, 무역수지 조정을 위한 관세 등의 조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CHIPS·칩스법) 등 한미 간에 손익이 걸린 사안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 트럼프를 상대로 과연 윤석열 정부는 능수능란한 외교를 펼칠 수 있을까. 국익을 수호하고,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받아낼 수 있을까. 일단 윤 대통령의 인식부터 안이하다.
7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서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트럼프는 바이든과 전혀 다른 사람이고, 검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고, 동맹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이 방위비 분담을 더 해야 하고, 심지어 한국을 돈 찍어내는 기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께서는 트럼프 당선인과 어떻게 우정을 다져나갈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윤 대통령은 “그분들은(윤 대통령과 관계를 맺어온 국제 인사들) 뭘 보고 하는진 모르지만, 한참 전부터 윤 대통령과 트럼프가 좀 케미가 맞을 것이라고 했다”며 “아마 정치를 처음 해서 대통령이 된 그런 점을 얘기한 것이 아닌가”라고 답했다.
윤석열과 트럼프, 두 사람이 어딘가 닮긴 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즉흥적이란 점에서 닮았다. 주 69시간 근로, 만 5세 입학, 킬러 문항 금지 등 윤 대통령의 즉흥 발언이 빚은 국정 혼선 사례들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트럼프도 즉흥성으론 둘째가면 서러울 사람이다. 즉흥 발언으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고, 즉흥 발표로 이벤트 효과의 극대화를 노려왔다.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를 오래 진행하며 갈고 닦은 순발력과 미디어 감각은 즉흥성의 효과를 배가시킨다. 한 마디로 트럼프는 계산된 즉흥성으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반면, 윤석열은 무념의 즉흥성으로 국정의 혼란을 자초하고, 공동체의 손실을 극대화한 전례가 있다.
이미 윤 정부는 일본에 여러 차례 선물을 주면서도 반대급부를 챙기지 못했다. 강제징용 배상 문제의 해결책으로 국내 기업들이 출연한 기금으로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대납하는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을 통해 일본 정부와 기업의 역사적·법률적 책임을 면제해줬고,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방사능 오염수를 공해상에 방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 정부가 아닌 야당과 싸우며 국민 세금으로 국내 어민에게 피해를 보상했다. 이렇게까지 퍼주는데도 받아온 것이 일본의 무역규제 철회라고 한다. 미국 쪽에도 비슷했다. 미·중 무역전쟁과 미국의 나홀로 호황 탓에 최근 대미 수출이 급증한 혜택을 우연히 얻기도 했지만, 미국의 IRA법과 칩스법 등에서 예외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며 한국의 대기업들이 국내에 투자하는 대신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에 많이 투자하는 상황을 지켜만 봤다. 한국경제가 지표 개선에도 내수가 계속 부진한 데에는 이렇게 구조적 원인이 있다.
그나마 계산에 밝은 이명박 전 대통령조차 부시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다른 나라들이 수입하지 않은 30개월령 이상의 쇠고기를 들여오다가 2008년 촛불집회라는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를 양국 의회에서 조기에 비준해 국정 성과를 내려는 의욕이 과했고, 이는 양국 간 협상에서 불리하게 작동했다. 그때보다 윤석열 정부의 상황은 더욱 불리하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윤 대통령에겐 트럼프와의 관계를 통해 한미 동맹을 강화했다는 외교적 성과가 절박하다. 그러니 윤 대통령이 트럼프에게 환대와 대접을 받을수록, 아니 그 전부터 언론의 견제와 날카로운 취재가 필요하다. 이미 퍼준 뒤에는 늦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