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피한 오보, 피했어야 할 오보
모든 권리는 어느 정도 남용될 수밖에 없으며 표현의 자유는 특히 그러하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의 말이다. 틀린 말을 너무 강하게 통제하려 들면 표현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침해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론에 오보 책임을 물을 때도 무조건 사실과 다른 보도를 했다고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한국에서도 일정한 경우 언론의 오보 책임을 면제해주는 원칙이 확립돼 있다. 언론이 사실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믿은 데에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오보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다. 상당한 이유를 인정받으려면 보도가 일정 수준 이
조정훈이 던진 '월 100만원 가사도우미'란 어그로
미래에도 유지될 언론의 핵심 경쟁력은 무엇일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누군가 감추고자 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역할이다. 챗GPT가 개발되는 과정에서 유해 콘텐츠를 걸러내는 작업을 케냐의 노동자들이 시급 2달러도 되지 않는 급여로 수행했고, 그들이 이 일을 하면서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 타임지의 보도가 올해 초 나왔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고도화되어도 은폐된 진실을 밝혀내기는 어렵고, 중이 제 머리는 더욱 못 깎는다. 힘을 가진 자에 대한 견제는 미래에도 언론의 몫이다.또 다른 핵심 경쟁력
익명 보도, 언론이 '카더라 통신'이 되는 순간
지난 3월7일 데일리안은 제목에 단독을 달고 서울시 관계자를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다. ([단독] 서울시 행정갑질? 표적수사? 시비 지원사업 관리감독 당연다음주 공공일자리 실사) 탈시설 관련 정책 사업에 대한 서울시의 갑작스러운 감사에 전장연이 표적수사라며 반발하자, 이에 대해 서울시 관계자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것이다. (관련 기사 : 서울시, 전장연 압박하며 탈시설 조이기 본격화)탈시설은 중증장애인이 수용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평등하게 살아가는 정책을 말한다. 비장애인은 태어날 때부터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삶이 자연스
정의 없는 전환
어떤 정치공동체 내에서, 혹은 서로 다른 정치공동체 간에 아주 중대하고도 심각한 인권 위반의 유산이 내려온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정치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분야를 전환적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2차 대전의 사례로 본다면 독일과 유대인 공동체 간에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전환적 정의를 이해할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이런 정의가 요구되는 이유인데, 바로 중대하고도 심각한 인권 위반에 대한 치유 때문이란 점이다. 관련 연구자 모두가 동의하는 일치점이 있다면, 전환적 정의
저널리즘 집어삼키는 인공지능
새로운 인공지능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달 버즈피드(Buzzfeed)의 최고경영자 조나 페레티(Jonah Peretti)는 인공지능이 언론사의 편집과 경영에서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버즈피드는 오픈에이아이(OpenAI) 기술 기반 인공지능으로 독자를 위한 개인화된 퀴즈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저널리즘에서 활용방식을 탐색하던 세마포(Semafor)의 기자는 인간이 작성한 기사의 비문과 오타를 점검해달라는 요청에 수정사항과 이유를 제시하는 인공지능이 무난한…
노동 기사 읽기가 두려운 이유
몇 년 전만 해도 언론에 쓰여지지 않는 노동에 대해 자주 한탄하곤 했다. 매일 노동자가 일터에서 다치고 죽어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파업을 해도 기사 한 줄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간혹 대공장 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하면 귀족노조 프레임을 덧씌우는 기사들이 사회면 톱기사를 장식하는 정도였다.그런데 최근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노동, 그리고 노동조합 기사가 그야말로 쏟아져 나온다. 사회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종합면, 경제면, 논설 꼭지에 이르기까지 지면도 다양하다. 다만 기사의 톤은 매우 획일적이다. 노
노란봉투법과 언론의 역할
노동의제를 대하는 언론의 관점을 보고 있을 때면 몹시 걱정스럽다. 이번에는 이른바 노란봉투법을 두고 각 언론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린다. 하나의 법안을 두고 여러 주체들이 각자 의견을 내어 토론하는 것은 민주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다. 언론은 이때 각 주체들과 사회 구성원들에게 다각도에서 조망한 사실을 제시하고 사회가 보다 더 공익에 부합하는 이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언론은 지금 그 역할을 잘 하고 있을까? 도리어 언론이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방해하고 있다는 판단을 한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 2월11일부터
검찰 받아쓰기와 게으름
1920년대 독일에서 법조기자는 창의적 글쓰기를 못 하는 무능한 글쟁이로 평가받았다. 최고 학벌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는 법률가와 비교하면 법조기자는 검찰 기소장이나 베끼는 건달에 불과했다. 그들은 검찰 기소장과 법원 판결문을 요약한 기사에 자기 이름을 다는 정도로 법률가와 동급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이러한 관행을 깨고 법조 보도의 전형을 만든 사람이 파울 슐레징어(1878~1928)였다. 그는 매일같이 베를린 형사법원 방청석에 앉아 범죄가 발생한 환경과 사건의 전개 과정을 재구성했다. 때로는 증거를 따라서 현장도 찾았다. 예나 지
'언론윤리'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얼마나 윤리적인가
김만배씨와 기자들의 거액 돈거래를 계기로 언론윤리가 다시 많이 거론된다. 많은 언론이 언론윤리의 추락을 개탄하고, 특집 보도도 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우리는 실제로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언론윤리 문제를 너무 사건화하는 건 아닐까?언론윤리 문제의 사건화를 걱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종종 언론윤리 문제의 복잡성과 구조적 측면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사실관계가 충분히 드러나기도 전에 평가를 끝내고 금방 어딘가에서 터질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윤리 문제가 어느 언론사, 나아가 어느 언론인에게나 문제가 될 수
문제가 만연한 시대, 언론의 역할
만 9년을 못 채운 채 기자를 그만두고 정책연구자란 정체성으로 지낸지가 5년 가까이 지났다. 현직 때보다 기자의 일은 언론계에서 통상 인식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저널리즘이 위기란 말이 나온 게 하루이틀이 아니고, 기자란 직업의 명칭은 멸칭으로 더 자주 호명되는 이 시대에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공론장에서 다뤄진만큼 진전이 있든, 퇴보를 하든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공론장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안을 모색하게 한다. 대안이 정책으로 실행된 뒤에 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