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권력의 거리

[언론 다시보기]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만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8월21일 미디어오늘이 “현직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국가정보원 직원이 친분 있는 여성 기자들의 사진을 공유하면서 성희롱 대화를 일삼아 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확인된 피해자만 이미 최소 3명이고, 그 대화 내용은 지면에 옮기기 난감할 정도다.


특히 핵심 권력기관의 직원과 유력 언론기관의 고위직을 담당한 이들이 타인의 사진을 아무런 허락 없이 사용하고, 자신들의 성적 만족감을 위해 성적 희롱과 모욕을 가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할 행위다.


더하여 이번 사건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이 일이 언론의 고위 간부가 권력 핵심기관의 직원에게 일종의 ‘메신저를 통한 성희롱거리 상납’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 A씨가 허락 없이 찍은 동료 여성 기자의 사진 등을 제공하고 국정원 직원인 B씨가 이에 응하며 즐기는 방식이었다.


이 사건을 보도한 미디어오늘이 지적하듯 “취재원과의 인맥 유지가 주된 업무인 언론계”에서, 그 인맥 유지의 한 방식으로 심지어 동료 또는 후배 언론인마저 그 수단으로 삼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용한 셈이다. 소위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파렴치한 경우다.


이런 ‘취재원과의 인맥 유지’란 맥락을 조금 확장해서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언론과 권력 간의 관계에서 주요한 문제 하나를 제기한다.


‘언론사 고위직과 권력기관 직원이 매우 사적인 문자를 주고받아도 되는 것일까?’ 더 짧게 표현하자면, ‘언론과 권력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워도 되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 사건을 단지 사적 대화에서 일어난 일탈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과 언론 사이의 결탁이 만연한 게 아니라면 이들 간의 잘못된 일은 일탈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더하여 이런 일탈은 너무 가까운 거리, 더하여 그 가까운 거리를 제공하는 사적 공간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사적’일수록 거리가 가깝다는 의미이고, ‘공적’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특히 메신저의 시대가 이런 사적 공간을 너무 쉽게 열 수 있게 해놓은 만큼, 언론과 권력은 항상 그 관계가 ‘공적’일 수 있도록 양자 간의 거리를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권력은 대체로 자신을 감시하는 언론을 가까이 두려 하는 속성이 있다. 그 가까운 거리가 비판을 막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의 거리를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언론이다. 가까울수록 자세히 보일 것 같지만, 너무 가까우면 보이는 것을 말할 수 없게 된다.


물론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는 언론의 처지에서 보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특히 권력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파악하기 어려운 정보를 다룰 땐 더욱 그렇다. 이 정보를 먼저 차지하려는 언론 간의 경쟁이 심할수록 권력과 언론 사이에 적정 거리 유지는 더욱 난제가 된다. ‘검언유착’은 이런 어려움이 드러난 표현 중 하나다.


그럼에도 ‘권력과 두는 일정한 거리가 신뢰할만한 언론 보도의 핵심’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이 권력에 있는 이들과 사적인 소통 채널을 일상적으로 마련하는 일은 옳은가?’


만약 언론 종사자가 개인적으로 최고 권력자와 혹은 권력의 핵심인사들과 사적인 문자를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면, 이들과의 사적 관계를 통해 주요 보도를 먼저 선점할 수 있다면, 권력을 향한 비판적 보도와 취재를 과감하게 수행할 수 있을까?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전 기획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 폭로 보도(1971년), 닉슨을 물러나게 만든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1972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탐사보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는 ‘언론과 권력의 거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언론과 정치 권력의 긴장은 피할 수 없다. 만약 둘 사이가 너무 좋다면, 뭔가 큰 잘못이 벌어지고 있는 게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