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도 똑같은 언론
신년 벽두에 실시된 JTBC 신년특집 대토론회를 보면서 예감할 수 있었다. ‘아 올해도 작년하고 다를 바가 없겠구나’, ‘하던대로 하겠구나’. JTBC의 안일한 토론회 준비가 가장 눈에 띄었다. 정치개혁과 언론개혁 토론회 출연자들의 면면을 보자. 직함은 생략하겠다. 유시민, 진중권, 전원책, 이철희, 박형준…. 십여년째 무슨 토론회가 열릴 때마다 얼굴을 내미는 패널들이다. 정치개혁 토론은 ‘썰전 외전’을 보는 줄 알았다. 이들은 정치권 언저리에 있던 50~60대 남성들이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을 상징하는 얼굴이다. 그나마 이창현, 정
의도된 오보
사람들은 세상이 더 나빠져 간다고 말하지만 알고보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할 때가 많다. 가짜뉴스 논란 같은 것도 그렇다. ‘검찰발 가짜뉴스’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 오늘이다. 국가기관인 검찰과 ‘가짜뉴스’의 조합은 낯설다. ‘가짜뉴스’란 표현이 정치적으로 남용되는 것을 우려해 정의를 좀 더 명확히 하자는 주장도 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뉴스의 형식으로 포장해 신뢰성을 부여하고 혐오에 기반한 정치를 재생산하는 사례만을 가짜뉴스라고 부르고 이것을 규제하자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관료적 해법을 서둘러 마련하기 전에 다음과 같
‘골목식당’ 떡볶이와 ‘거리 노래방’
‘기자협회보’ 칼럼은 주 독자가 기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쓴다. 어느 송년회 자리에서 한 기자가 “올해가 어서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올해 곤욕을 치렀던 터다. 올 한 해 기자들은 많은 욕을 먹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기자의 잘못 또는 실수로 인한 합당한 비판도 많았지만, 때론 판단이 어려운 논란의 영역도 있었고, 일부는 사실관계가 틀린 일방적 매도도 꽤 있었다. 그러나 생산자의 정당함을 논리적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헛된 시도보다는 소비자의 심사를 먼저 살피는 게 공급자가 갖춰야 할 도리이자, 현명한 처사라 생각한다. 언론
그림에 목매는 취재 관행
스페인에 있는 피카소박물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사물을 세밀하게 묘사한 스케치다. 그림 기법을 완벽히 파괴한 입체파 거장이 되기 전, 피카소는 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데생, 소묘 등 기본기를 익혔다. 대부분 미술대학은 신입생에게 스케치를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기본기가 있어야 비로소 ‘그림’이 나온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재난보도가 손가락질 받는 이유도 여기 있다. 재난보도 준칙이나 언론 윤리 같은 기본기를 등한시 한 채 ‘명작’만 꿈꾼다. 재난방송의 패착은 특종, 단독 또는 얘깃거리가 되는 ‘그림’ 찾기에 지나치게 목을 매는 데
뉴스를 평가하자
전문가와 일반인 모두 작금의 인터넷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언론의 뉴스 생산 관행(예, 클릭 수 늘리기)과 포털이 지배하는 뉴스 유통 구조가 정상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자율 심의·규제 기구의 다양한 시도는 언론의 좋은 저널리즘 실천에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포털도 기업의 특성(뉴스 생산이 아닌 매개 역할)과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제도나 법률적으로 논의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는 근거의 부족’을 핑계로 뉴스의 사회적 책무 실천에 매우 미온적이다. 매스미디어 환경에서 이용자는 뉴스 시청이나 구독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여 뉴스 생
‘노가다’와 데이터
건축 및 토목 노동자를 의미하는 일본어 도카타(土方, ドカタ)가 어원인 ‘노가다’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노동을 뜻하는 ‘막일’의 속어다. 데이터(data)는 사전적으로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문자, 숫자, 소리, 그림 등의 형태로 된 정보를 말한다. 노가다와 데이터, 각각의 의미만 봐서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지난 22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데이터저널리즘코리아 컨퍼런스’에서 이 두 단어가 함께 자주 등장했다. 특히 데이터 저널리즘 보도 사례 위주 발표였던 3부에서 더욱 그러했다. 네 명의 3부 발표
새로운 시대의 칼, ‘조회수’와 펜의 싸움
얼마 전 방영된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악플과 이를 조장하는 인터넷 뉴스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무차별적인 ‘실검 기사’나 클릭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낚시성 기사 생산, 이로 인한 악플 등은 이미 위험 수위를 한참 넘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지만, 지금 우리는 조회수라는 새로운 시대의 칼과 마주하고 있다. 현재까지 스코어는 암울하게도, 조회수가 압도적 우세다. ‘기레기’라고 멸칭하며 개인의 열악한 윤리 의식을 규탄하기는 쉽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뉴스 생태계의 문제점이 은폐된다. 광고가 뉴
‘기레기’라는 문제
기자들이 하도 ‘기레기’로 지탄을 받으니 이젠 그 말이 그리 신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기자들은 볼멘소리를 내고 싶어도 대놓고 어디에 쓰거나 말하지는 않아왔다. 내심 언론이 지은 죄를 알기에 대꾸하지 않거나 혹은 ‘저들은 반대편이야’ 하면서 자기들끼리 독자들을 욕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요샌 “기자들 모두를 기레기 취급하면 오히려 좋은 기사를 쓰려는 이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며 반격하는 기자들이 보인다. 최문선 한국일보 기자의 지난달 칼럼 같은 게 그런 예다. 미디어 수용자들 사이에서도 기자들에 대한 그런 무차별 공격보다는 핵심을…
조금 떨어져서 봐야 할 국가, 북한
초등학생 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아주 가벼운 사고인데도 어머니는 깜짝 놀라 사고현장까지 울며 달려왔다. 가까운 것이 먼 것보다 크게 보이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폭행사건에는 수많은 국민이 분노하지만,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대형 살상극에는 무덤덤하다. 문제는 이 거리감의 본성이 이성적인 판단을 흐린다는 데 있다. 우리는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 과민반응한다. 북한을 ‘같은 민족’이라 생각해 가깝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언론은 북한의 모든 행동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 아무리 남북의 평화와 비핵화, 경제협력이 중요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 재설정해야
저널리즘학자 월터 기버는 1961년 가을에 발표한 논문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 시청 출입처 사례연구에서 세 가지 가설적 모형으로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를 설명한다. 먼저, 독립적 관계 모델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기자와 취재원은 상이한 사회체제의 구성원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행동한다. 둘은 조직이 개인에게 부여한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인식이 달라 뉴스 가치에 대해 갈등적 견해를 보일 수 있으며, 어느 일방이 뉴스가치에 만족하지 못할 때에만 피드백이 발생하므로 둘 사이에는 최소한의 커뮤니케이션만이 존재한다. 둘째, 상호의존적 관계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