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기간을 막 지난 졸업생이 찾아와 공들인 기사와 트래픽이 터질 기사 사이에서 무엇을 써야할지 매일 고민한다고 하소연했다. 며칠씩 발품 팔아 취재한 기사의 조회수는 낮은데,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을 제목 일부 바꾸고 조금 살붙여 기사를 쓰면 트래픽이 터질 것을 아는 상황에서, 많이 읽을 기사를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 신입 기자의 고민은 그만의 것이 아니다. 한 가족의 비극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강 대학생 사건이 그다지도 자주 기사가 된 이유를 기자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
공들인 기사와 트래픽이 터지는 기사 사이에서의 갈등은 기자들의 고민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번 학기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게 ‘좋은 기사란 이런 것’이라고 일독을 권했던 것들 중 학생들이 뉴스를 보기 위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포털에서 “이미 본 적이 있다”고 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포털에서 좋은 기사를 쉽게 찾기 어려우니, 기자사회 내부에서 각종 상을 받으며 격려를 받아도 집안 잔치로 끝나고, 뉴스 소비자들은 한국 기자들이 질 낮은 기사만 양산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포털 탓만으로 끝날 일인가. 언론사들이 지난 삼십여 년간 충성 독자를 만드는 방식이 어땠었는가를 돌아보자. 기사의 질을 높이는 일로 경쟁하기보다는 ‘집토끼’들이 시원해하는 사이다든 해장국이든 만드는 것으로써 각자의 영토를 굳혀오지 않았는가.
최근 일명 미디어바우처 법안이 발의됐다. 국민들이 언론사에 전자바우처를 지급하는 이 법안에는, 선호하지 않는 신문에는 의사표시로서 마이너스바우처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도 담겨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온라인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미디어바우처 제도 실시에 대해 응답자 75.4%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국민들은 모두 공평무사한 존재인가. 어떤 이슈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갖지 않은 사람이 보았을 때는 중립적인 보도도, 그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정파성이 뚜렷한 이용자들은 달리 본다. 해당 보도가 자신에게는 불리하게, 자신의 반대편에는 유리하게 작성됐다고 인식하는 적대적 매체지각(hostile media perception)이 작동하는 것이다. ‘기레기’들의 기사를 온라인 공간에 박제하기 위해 운영된다는 크라우드 소싱 방식의 웹사이트에 가 보면, 이유가 무엇인지 합리적인 설명도 붙지 않은 채 신고한 사람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에 ‘헛소리’ ‘선동’ ‘가짜뉴스’라는 딱지가 붙는다. 이런 정황을 보자면, ‘좋은 언론’이 누군가 ‘좋아하는 언론’이 아닐 경우 마이너스바우처를 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 견해를 갖는 일은 국민 개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나와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시민성(civility)은 갖춰야 한다. 그러한 시민성이 길러질 수 있는 공론장의 역할은 언론이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그 길보다는 나와 다른 견해를 적대시하는 확성기 역할에 안주해왔기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언론이더라도 옳은 말을 할 때는 ‘좋은 언론’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시민적 관용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좋은 언론이 좋은 언론을 감식할 수 있는 뉴스 이용자들을 만들고, 그런 뉴스 이용자들이 좋은 언론을 지지하는 되먹임(feedback)의 구조를 한국 언론은 만들지 못해온 것이다. 미디어바우처 법안 발의 앞에서 마음이 복잡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