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는 광주 진압의 예행연습장이었다.” 김선미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이 내게 해준 말이다. 수사적 표현인 줄로 알았다. 두 사건 모두 시민은 계엄군의 총칼에 위협받았다. 시기적으로 10·16이 5·18보다 7개월 먼저 일어났다. 부마에서 터져 나온 거대한 민주화 열망을 기억해 달라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실체적 진실이었다. 군부에게 부산·마산의 일은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학살을 자행하게 한 직접적인 ‘교훈’으로 작용했다.
부마항쟁진상규명위원회 도움으로 40년 전 군부가 남긴 문서 수천 장을 확보했다. 부마항쟁 진상이 담겨 있었다.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그가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는 “데모대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 의지를 상실하도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고 썼다. 그들이 1979년 10월 부산 마산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데모 의지 상실’을 위해 부마에서 사용한 수단은 고스란히 광주에서 되풀이됐다. 1979년 정권은 편의대로 불리는 공수부대 사복 공작조를 투입해 시위 정보를 캐냈다.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공격용 헬기인 UH-1H를 동원할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광주에서 공수부대는 활개 쳤고, 헬기는 시민을 향해 실탄을 쏴댔다. 부마가 흘리지 않은 피는 광주가 대신 쏟아야 했다. 전남대 안종철 박사는 내게 “부산 사람은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쓰는 부마항쟁 보고서 2’는 지난해 보도에 이어 올해 다시 준비한 기획이다.
부마의 진실은 너무나 긴 세월을 군부 캐비닛 속에 갇혀 있었다. 부마항쟁은 4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대통령 입에서 부마의 진상 규명을 돕겠다는 약속이 나왔다. 부산·경남이 국가에 바랐던 조처 대부분이 이뤄졌다. 이제 우리 차례다. 내년은 5·18 40주년이다. 부마를 대신해 피 흘린 광주를 기억해야 한다. 10월16일 경남대에서 열린 부마항쟁 국가기념식에서 광주 오월소나무합창단은 부마를 위해 ‘우리의 소원은 자유·민주·통일’을 불렀다. 내년 5월 망월동에서 부산과 경남이 광주와 손잡고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길 기원한다. 이는 수사적 표현이자 실체적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