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해직 삼천일.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써내려가기란 예상과 달리 썼다 지웠다를 몇 시간 째 반복하고 있다. 굉장히 많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막상 내뱉으려면 아무 말도 마무리가 되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이 행사는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해직한 때부터 날짜를 세는 건 삼천일까지 와서는 안됐던 것이다. 심지어 이번 행사에선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상영하는데, 다큐 내용 중엔 작년에 이 다큐멘터리의 가편집본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번 삼천일 행사에서 YTN 해직자들과 동료 조합원들은 ‘과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작년의 자신들의 모습’을 다시 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6명이 해직된 10월 6일이 되면 매번 반복되어지는 일이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반복이다. 지켜내지 못했던 과거의 무기력함을 상기하고, 다시 복귀시키지 못하는 현재의 무능력함을 상기하며 도무지 보이지 않는 실낱같은 희망을 찾는 것으로서의 삼천일은 그래서 참으로 잔인하다.
다행히, 너무나 다행히 촛불이 시대의 역행에 제동을 걸었다. ‘고문’ 앞에 사라졌던 ‘희망’이란 글자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매번 웃는 얼굴이지만 이번엔 특히 세 해직언론인(현덕수, 조승호, 노종면)의 사진 속 표정이 유난히 밝다.
해직자가 복직된다고 해서 자동으로 방송이 정상화 되냐고 묻는 이들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해직자 복직 없이 방송이 절대로 정상화 될 수 없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따지면 해직자 복직이 순서로 봐도 분명 먼저다.
내부에서 복직만 바라보고 손 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부터 YTN 노조는 사측이 없앴던 돌발영상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비록 방송이 아닌 인터넷과 SNS를 통해 배포하지만 풍자의 질은 결코 예전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예의 그 정겨운 배경음악은 보너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시민들의 작은 관심이다. 한 때 외쳤던 윤택남에 대한 추억이어도 좋고, 해직 언론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부채의식이어도 좋고, 다큐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어도 좋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시민들의 관심이 YTN 해직사태를 푸는 마지막 열쇠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맨 처음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사장에 맞서 모든 걸 걸고 싸운 중요한 이유중 하나가 바로 시민들의 관심 때문이었을 테니까. 힘내라며 시민들이 보내준 작은 손 편지 한 장, 쏟아지는 응원의 선물들, 귓가에 울려 퍼지던 윤택남이란 말이 특히 어떤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분명 이들에게 돌아갈 다리를 마음속에서 불사르게 만들었을 테니까.
다큐를 먼저 본 한 평론가 분은 이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평을 했다. 모든 해직자들이 다 복직을 하고, 그 모습을 영화에 오롯이 담아야 비로소 그 때 끝날 수 있다는 거였다. 무릎을 내려쳤다. 이 영화의 본질은 바로 그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삼천일이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최대한 빨리 마무리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부디 내년엔 해직 며칠이 아니라, 전원 복직 며칠로 행사명이 바뀌길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아니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