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들 월급이 반으로 줄어도 그렇게 얘기할까요? 정말 서러웠습니다.”
한 지역 방송사에서 프리랜서 라디오 작가로 일하고 있는 A씨는 최근 맡고 있는 프로그램 한 개가 줄어들었다. 경영이 어렵다며 회사가 일방적으로 폐지한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A씨가 전담해왔지만 그는 폐지와 관련한 어떤 논의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폐지 소식도 건너서야 전해 들었다. A씨는 “계약서를 1년에 한 번 쓰긴 하지만, 10년 넘게 일했으니 암묵적으로 계속 일할 거라 생각했다”며 “그런데 ‘회사가 어려우니 양보하는 수밖에 없다’며 일방적으로 프로그램을 폐지하더라. 결국 하루아침에 수입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A씨가 일하고 있는 지역 방송사는 자체 제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한 손에 꼽는다. 그 소수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들은 대부분 프리랜서다. 표면상으론 담당 PD가 있지만 프리랜서 작가, 리포터, 아나운서가 사실상 기획부터 진행까지 전담하고 있다. “프리랜서들끼리 밥 먹고 멀리 드라이브하러 나갈 때가 있어요. 그러면 우스갯소리로 ‘여기서 교통사고 나면 방송사 문 닫아야 돼’라는 말을 하거든요. 정말 저희 없으면 방송이 안 돌아가는데, 그럼에도 저희를 우습게 보는 풍조가 만연한 게 슬픕니다.”
A씨는 작가지만 글만 쓰진 않는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아이템 선정, 인터뷰 섭외, 심지어 선곡까지 모든 과정을 혼자 담당한다. 간혹 방송사에서 행사를 주최할 때도 마찬가지다. 관계자를 안내하고, 다과를 준비하는 등 잡다한 일은 모두 그가 한다. “수도권 방송사에선 음악 방송 하나를 해도 담당 PD가 따로 있거든요. 선곡도 하고 원고 방향도 지시하고. 그런데 지역은 그런 게 없어요. 그냥 작가가 모든 잡일을 다 한다고 보면 돼요.”
1시간짜리 방송을 위해 그는 하루 5~6시간, 때로는 그 이상을 준비한다. 하지만 보수는 턱없이 적다. 프로그램 원고료는 건당 평균 10만원이 채 안 되는 상황. 그마저도 프로그램 하나가 폐지되며 그는 최근 아르바이트를 고민하고 있다. “작가 일과 다른 일을 병행하기 쉽지 않거든요. 막말로 카페 알바라도 해 100만원이라도 더 벌어야 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자체방송 줄며 지역방송 떠나는 프리랜서
A씨의 사례는 지역 방송사에선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다. 오요안나 MBC 프리랜서 기상캐스터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방송계 프리랜서의 열악한 현실이 조명을 받고 있지만, 누구보다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이들은 바로 지역 방송사 프리랜서다. 본사의 경영 악화, 또는 지역 방송사 자체의 경영 악화로 인력, 프로그램이 계속 축소되는 상황에서 그 부담은 이들에게 제1순위로 전가되고 있다.
관련한 최신 통계는 없지만 지역에선 자체 제작 프로그램이 축소되며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증언이 나온다. ‘2024 방송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16개 지역MBC의 자체방송 비율은 TV의 경우 평균 14.7%로, 10년 전과 비교하면 1.5%p 낮아졌다. 라디오 방송은 더 심각해 표준FM은 8.7%로 10년 전에 비해 11.1%p 줄었고, FM4U 역시 같은 기간 6.0%p 감소했다. 심지어 전주MBC·MBC강원영동 표준FM, 제주MBC·목포MBC FM4U는 자체방송 비율이 5%를 넘지 않는다. 이렇게 자체방송 비율이 줄어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건 바로 이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던 프리랜서 등 비정규직들이다. 제작할 프로그램이 사라지면서 이들은 자연스레 일거리를 잃고 지역 방송사를 떠나고 있다.
‘비정규직 백화점’ 주 종업원은 프리랜서
급작스럽게 제작 현장을 떠난 프리랜서들은 쉽게 경제적 어려움에 노출된다. 10년을 넘게 일해도 퇴직금 한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리랜서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닌 ‘사업자’이기에 퇴직금 지급은 물론 연차나 월차 발생, 상여금 지급 대상에서도 예외다.
‘비정규직 백화점’으로 불리는 방송사엔 이런 프리랜서가 유독 많다. 고용노동부의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2021’ 자료에 따르면 지상파 3사의 시사교양국·보도국 내 프리랜서는 1125명으로 정규직(1078명)보다 많았다. 특히 PD, 작가, 아나운서 등 방송직의 경우 비정규직 중 프리랜서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방송작가는 97.4%, 아나운서는 92.9%, PD는 85.7% 수준이었다. 지역 방송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처우만 나쁜 것도 아니다. 이들은 정규직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더 쉽게 노출돼 있다.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모임인 엔딩크레딧이 2023년 8월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프리랜서 10명 중 7명이 괴롭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부당지시는 물론 업무 외 일 강요, 따돌림과 차별, 모욕과 명예훼손, 심지어 폭행이나 폭언을 당한 비율도 일반 직장인의 2배를 훌쩍 넘었다. 이들은 “새벽 3시 넘어 온 선배 메시지를 20분 늦게 봤다고 전화로 쌍욕을 먹었을 때”나 “참고 견뎌야 하는 무수한 부조리들, 이상한 관습들”이 방송 일을 하며 겪은 가장 힘든 상황이라고 증언했다.
지역도 마찬가지다. 특히 지역 방송사에선 근래 근로자성이 인정돼 복직한 프리랜서 아나운서, 작가들이 늘어나며 이들을 괴롭히는 사례가 부쩍 많아지고 있다. 법률투쟁을 거쳐 복직한 프리랜서에게 각서 작성을 강요, 향후 부당한 일이 있어도 투쟁할 수 없도록 싹을 자르거나 더 이상 같은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저하된 노동 조건을 제시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한편 아직 프리랜서인 이들에겐 계약서를 보완해 더욱 근로자성을 지우고, 장기간 일한 프리랜서는 내보내는 방식의 대응도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송사가 근원적인 인력 구조 및 채용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고 급감·정치권 탄압에 경영상황 악화
다만 지역 방송사 여건은 녹록지 않다.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방송사 경영 사정이 악화하고 있고, 이는 지역 방송사라고 예외는 아니기 때문이다. 방송 광고수입이 급감하는 가운데 OTT 등의 영향으로 방송제작비는 늘어나면서 지역 방송사들 대부분은 적자 전환한 지 오래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공시 대상인 13개 지역MBC의 2023년 매출액은 10년 전에 비해 1000억원, 방송광고수입은 989억원 줄어들었다. 영업이익 역시 2017년 즈음 일제히 손실로 전환해 10년 전과 비교하면 240억원 가량 감소했다. 9개 지역 민영방송 역시 같은 기간 매출액은 175억원 늘어났지만 방송광고수입이 583억원 급감하며 영업손실이 96억원으로 불어났다.
비상 경영 역시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방송사별 차이는 있지만 인원 감축을 비롯해 △방송 외 사업 △부동산 등 자산 매각 △명예퇴직 △의무 안식년 △임금 삭감 등 사실상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는 다 하고 있다. 지역 방송사 한 관계자는 “광고매출이 급감하며 경영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고, 이를 보전하기 위해 수익 사업을 발굴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며 “오히려 지역 방송사들에선 방송통신위원회 재허가와 관련해 자체 편성비율, 제작비율을 줄이자는 요구가 쏟아지고 있다. 게다가 수시로 다양한 직무의 인력 수요가 발생하는 업무 특성상 유연한 대처가 어려운 것도 현실”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시장 상황과는 별개로 수신료 분리징수 등 정치권의 공영방송 탄압이 이어지며 지역 방송사 재정은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2023 KBS 경영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KBS는 수신료 분리징수에 따른 수신료 수입의 불확실성과 광고수입의 급락 등 경영상황 급변으로 지난해 지역KBS의 정규·특집 제작비를 전년 대비 90% 수준으로 편성했다.
방송 현장 뜯어고칠 절호의 기회는 지금
다만 경영이 어렵다고 지역 방송사 프리랜서들의 눈물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은 방송계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이야말로 비정규직 백화점의 대명사가 된 방송 현장을 뜯어고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한다.
김유경 노무법인 돌꽃 노무사는 “노동자가 사망해야지만 비정규직 문제가 공론화된다는 것이 안타깝고 슬프다”며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자, 심지어 직장 내 괴롭힘 한 번만 있어도 처벌하자는 여러 입법이 쏟아져 나오지만 여기서 실종된 얘기는 바로 사용자 책임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다. 무수한 비정규직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사용자 방송국이고, 실질적으로 근로자가 맞는데도 채용 당시 프리랜서로 위장하는 시점부터 문제가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방송사가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을 남용하고 있는지 기본적인 실태조사부터 해야 한다”며 “방송사들이 제대로 조사할 수 있게 고용부가 특별근로감독, 기획근로감독을 벌여 압박해야 한다. 만약 실태조사에서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게 밝혀지면 좀 더 실효성 있는 시정지도와 명령을 내리는 것이 문제를 바로잡는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론 고용부가 좀 더 전향적으로 방송계 프리랜서를 근로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A씨가 가장 바라는 것 역시 근로자성 인정이다. “프로그램이 갑자기 폐지되는 상황이 벌어지니 내가 근로자도 아닌데 법원에 가서 호소할 수 있을까,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증언이 있어야 하는데 다들 정직원이니 저에게 유리하게끔 증언해주지 않을 거잖아요. 그런 게 막막한데, 어쨌든 근로자성이 인정된다면 그걸 발판 삼아 좀 더 다른 것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