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을 가리켜 “기억력이 아주 정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으로부터 “싹 다 잡아들여”란 지시를 받았다는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의 증언과 검거 명단이 적힌 일명 ‘홍장원 메모’의 신빙성을 부정하며 한 말이다. 윤 대통령은 13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자신의 탄핵 심판 8차 변론기일에서 무려 18분간 홍 전 차장에 대한 성토를 쏟아냈다.
한 주 전에 열린 6차 변론기일에서도 윤 대통령측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 증언의 신빙성을 무너뜨리려 애썼다. ‘국회 안에 들어가서 인원(의원)들을 빨리 데리고 나오라는 대통령 지시를 받았다’는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의 진술을 부정하기 위해 윤 대통령은 “인원이라는 말을 써본 적 없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몇 분 만에 ‘인원’이란 단어를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스스로 발언에 모순이 있음을 드러냈다.
“기억력이 아주 정확”하다는 이날 발언 역시 마찬가지다. 우선 12·3 비상계엄 당일 조태용 국정원장이 아닌 홍장원 당시 1차장에게 전화한 이유를 설명한 대목부터가 그렇다. 윤 대통령은 “전주인가 전전주인가 (조태용 원장이) 미국 출장 때문에 주례 보고를 못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미국에 있는 줄 알고 전화했는데 (오후) 8시 반에 부속실장이 (조 원장을) 모시고 오길래 깜짝 놀랐다”고도 했다. 조 원장은 다음 날(4일) 출국 예정이었다.
또 홍 전 차장과 “딱 한 번 식사한 적 있다”면서도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조 원장이 홍 차장 데리고 해외 관련 업무, 아마 제 순방 관련 업무 아니었나, 아니면 어디 대사관 개설 문제 아니었나(싶다)”라고 떠올리면서 “저는 기억력이 아주 정확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의 ‘기억력’이 논란이 된 건 이번만이 아니다. 명태균씨 문제가 대표적이다. 대통령 후보 경선 등 과정에서 명씨의 도움을 받은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그의 부탁으로 김영선 국민의힘 의원 공천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지난해 10월8일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정치를 시작한 뒤 명씨를 만난 건 “두 번”뿐이며, “이후 대통령은 명 씨와 문자를 주고받거나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기억한다”고 밝혔다. 당시 ‘기억한다’는 이례적 표현을 두고 여러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약 3주 뒤, 윤 대통령이 취임 하루 전날 명씨와 통화에서 김영선 의원 공천을 당에 요청했다는 투로 말하는 육성 파일이 공개됐고, 1주일 만에 긴급히 열린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은 “경선 뒷부분 이후엔 ‘사실상’ 연락 안 했다 취지로 얘기한 건데” 대통령실 참모진이 잘못 전달한 것처럼 설명했다. 윤 대통령은 당시 “공천에 관해 얘기한 기억이 없다”면서도 “했다면 이미 정해진 얘기”였을 거라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의 ‘선택적 기억’은 계엄과 탄핵 정국에서도 이어졌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1월18일 서울서부지법 영장실질심사에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준 쪽지 속 비상입법기구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느냐’는 취지의 판사 질문을 받고 “쪽지를 내가 쓴 것인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쓴 것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고, 메모의 취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탄핵 심판은 물론 ‘기억력 싸움’이 아니지만 증언의 신빙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는 윤 대통령만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세력들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계엄의 위법·위헌성을 증언하는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1경비단장은 13일 변론기일에서 계엄 당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으로부터 국회로 들어가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윤 대통령측이 깎아내렸던 곽종근 전 사령관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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