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 찾은 후배에게 "연주야, 나 1년만 더 살고 싶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㉛13개월 만의 석방, 청천벽력 소식

1980년 2월 원자력병원에 입원했을 때. 안종필은 고통 속에서도 예의 눈주름 웃음을 지었다.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구치소에 갇힌 동료들이 하나둘씩 풀려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윤활식과 이기중이 11월8일 출감했고, 한방을 쓰던 홍종민이 11월14일, 정연주가 12월2일 석방됐다. 성동구치소에는 안종필과 김종철만 남았다. 12월4일 아침, 보안과장이 철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안 위원장님 석방입니다.”

안종필은 1979년 12월4일 성동구치소 철문을 나섰다. 1년 하고도 한 달이 지났다. 가족들과 동아투위 동료들 여러 명이 나와 있었다. 안종필은 광화문 한 식당에서 열린 환영회식에 참석하고 집으로 향했다. 감옥 안에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들과 딸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 커버린 아들은 반가움과 서먹함이 교차하는 표정이었고, 딸은 아빠를 꽉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며 놓아주지 않았다.

13개월 옥살이를 했으니 며칠 쉴 만도 한데 안종필은 출감 다음날부터 동분서주했다. 이른 아침 삼각지로 향해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의 군법회의 선고공판을 방청했다. 수도경비사령부계엄보통군법회의는 동아투위 등 5개 단체가 발표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성명과 관련해 이부영에게 4년을 선고했다. 판결 이유가 참 가관이었다. “성명서 나부랭이를 만들어 사회 혼란을 조성하려는 것은 마치 미꾸라지 몇 마리가 방죽을 다 흐려놓은 것 같다.”

안종필은 옥바라지해준 재야 민주인사들을 찾아 고마움을 전하고, 자신의 뒤를 이어 출감한 안성열과 김종철을 마중하고, 종로구 당주동 수진빌딩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동아투위 앞날을 토론하는 등 바쁘게 지냈다. 안종필은 1979년 12월29일자 <동아투위 소식>에 ‘더욱 당당히 자유언론의 대도(大道)를 위하여’라는 글을 실었다. 안종필은 이 글에서 혹독한 고난이 있었던 지난 1년을 돌아보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격려하고 도와준 민주인사들에게 사의를 표하고 자유언론의 대도를 걸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동아투위 동지 여러분.
지난 한 해는 다사다난이라는 말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건과 충격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0명의 동지가 1년 이상의 옥살이를 계속했으며 11월에는 이부영·임채정 두 동지가 구속되었고 이병주 위원장 대리를 비롯해 많은 동지들이 수 차례 연행되는 사태가 있었습니다. 투위 밖의 정치현실은 충격과 격변의 연속이었으며 그 상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들 자신의 동지적 유대를 더욱 굳게 다지고 냉철한 이성과 지혜와 용기로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우리들의 영원한 소망인 자유언론을 쟁취해야 합니다. (…) 우리는 언론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언론인이며, 그러기에 자유언론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자유와 기능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확신과 언론에 대한 우리의 뜨거운 신앙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야말로 우리는 우리들의 뜨거운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다시 펜과 마이크를 잡기 위해 우리들의 온 힘을 모아야겠습니다. 그 뜨거운 신앙은 우리들이 거리로 내쫓긴 이래 5년 동안 하루도 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으며, 더욱이 지난 1년 동안의 그 엄청난 고난들을 치르면서 더더욱 절실하게, 절박하게 느끼게 된 것입니다. (…) 지난 1년 동안의 온갖 회오리 속에서도 우리 투위가 이처럼 건강하게,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있음은, 우리들을 격려하고 성원하신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도움에 결정적으로 힘입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 뜨거운 성원과 도움은 우리에 대한 채찍질인 동시에 우리게 무한한 부채(負債)를 갖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랑의 부채를, 자유언론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갚을 수밖에 없습니다. (…) 이제 새로운 연대(年代)가 시작되려 합니다. 이 새로운 연대에, 이 땅에 진정한 새 역사가 꽃필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자유언론의 대도(大道)를 더욱 당당하게 걸어 나갑시다.


안종필은 이 글을 병실에서 썼다.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안종필과 동료들은 덕수궁 근처 원자력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 쫓겨나기 전까지 문화부에서 종교계 취재를 전담하며 의료·종교·과학계에 발이 넓었던 서권석이 원자력병원 원장이자 서울의대 교수인 이장규 박사에게 부탁해 이뤄졌다. 이장규 박사는 동아일보 해직언론인들과 인연이 각별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대량 해고에 항의해 1975년 3월 엿새간 제작거부 농성을 벌일 때 소고기 뭇국을 보내는가 하면 동아투위가 결성 뒤에도 해직언론인들의 병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며칠 뒤 검사 결과를 보려고 안종필과 동료들은 원자력병원을 다시 찾았다. 이장규 박사는 피검사 결과 안종필의 간 수치가 높게 나왔다며 보호자랑 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정연주는 “안 위원장 부인이 오셔야 한다는 말을 듣고 뭐가 잘못됐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고 말했다.

출감 2주 만에 입원… “3개월 넘기기 어렵다”

그 무렵 안애숙은 큰오빠의 전화를 받았다. 안종필은 원자력병원에서 보호자랑 같이 오라는데 네 올케는 약국 일로 바쁘니까 같이 가자고 얘기했다. 정밀검사를 마친 이장규 박사는 간과 위가 악화됐다며 입원해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안종필은 출감 2주 만인 12월17일 원자력병원 301호실에 입원했다. 이 박사는 안애숙과 장인 이만수를 따로 만나 감옥 생활로 영양 섭취가 제대로 안 돼 간암이 악화됐다며 3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안종필은 구치소에서 면회 온 가족들에게 단 한 번도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운동을 많이 하고 있고, 건강하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만 반복했다. 아내한테도 장인어른한테도 여동생한테도 남동생한테도. 그래서 가족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간암이라니, 3개월 밖에 못 산다니…. 안애숙은 부산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시외 전화를 돌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안종필은 출감 직전 두 달 동안 피로와 소화 불량을 겪었다. 10월 초부터 운동시간에 안종필의 달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조금 달리다 숨을 몰아쉬며 “왜 이렇게 갈수록 운동이 힘들어지지”라고 중얼거렸다. 한방에 모여 식사할 때 안종필은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왜 그렇게 식사를 못 드시냐고 묻자 안종필은 허리 뒤쪽을 만지며 자꾸 저리다고 했다. 어느 일요일 오전 교도소가 편의를 봐줘 안마를 잘한다는 죄수를 네 사람이 모여 앉은 방으로 불렀다. 그가 두 손으로 양쪽 옆구리를 거세게 누르자 안종필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비명을 질렀다. 12월14일 새벽 성동구치소에서 출감한 김종철은 마중하러 나온 안종필 안색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고 회고했다.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김종철(왼쪽에서 네 번째)이 1979년 12월14일 풀려나는 모습. 그 뒤로 안종필(왼쪽에서 세 번째)이 보인다. 훗날 김종철은 마중나온 안종필 위원장 안색이 창백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광자와 장인 이만수, 안애숙은 밤낮으로 안종필을 병간호했고, 동아투위는 권근술을 간사로 간병소위원회를 꾸려 간병을 맡았다. 부산에서 형제자매들이 번갈아 올라와 약을 챙겨주고 말벗하며 옛날을 추억했다. 한배에서 난 동기간인데도 다들 결혼하고 제 식구 챙기느라 1년에 한두 차례 얼굴 보기도 어려웠다. 병석에 누웠지만, 동생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종필은 행복했을 것이다.

문병객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천관우, 송건호, 문익환, 문동환, 공덕귀, 이우정, 함세웅, 이해동 등 많은 민주인사와 옥고를 치른 학생들이 줄지어 병실을 찾았고, 한국기자협회장 안택수를 비롯해 많은 현역 언론인들과 아사히신문 등 외신기자들도 병실을 찾아 안종필의 쾌유를 빌었다. 안종필의 경남고 동문들은 미국에서 새로 개발된 최신 의약품을 공수해 오기도 했다. 이장규 박사를 비롯한 의료진의 지극한 진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간암이라고 말해주자 고개를 돌렸다

가족들은 1월 말쯤 안종필에게 간암이라고 알려주었다. 더이상 감출 수도 없었고, 마지막 삶을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간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안종필은 이광자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표정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스쳤다. 이광자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우고 있었지만 안종필은 투병 의지를 불태웠다. 안종필은 문병 온 동료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동아투위 5년이 기적인 것처럼 반드시 병상에서 일어나 3월17일 투위 5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기적을 보이겠다. 반드시 일어나서 동아일보에 복직해서 기자 생활을 한 번 더 하고야 말겠다. 고난밖에 없었던 동아투위에 기적의 기쁜 소식을 반드시 전해주겠다. 내가 죽었을 때 100여명의 동지들이 받을 충격과 정신적인 부담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2월 초 어느 일요일, 정연주는 을지로2가 중앙극장 뒤편에 있던 향린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안종필을 병문안했다. 안종필은 병실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감옥에 있을 때 혼자 흥얼흥얼하며 따라부르던 ‘저 높은 곳을 향하여’였다. 정연주는 예배 때 목사님이 하셨던 성경 말씀을 전하며 위원장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안종필은 눈주름 웃음을 지으며 정연주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야, 연주야. 나 1년만 더 살고 싶다….”

안종필의 투병 소식을 들은 기자협회보 기자 윤병호는 2월13일 원자력병원 301호실을 찾았다. 윤병호는 의외로 초연한 안종필의 모습을 보고 죽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썼다. 안종필의 인터뷰는 1980년 2월23일자 기자협회보에 ‘간암과 투병중인 안종필씨’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80년 2월23일자 기자협회보.

한 동료 언론인이 간암이라는 치명적인 병고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신음하고 있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안종필 위원장이 현대 의학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간암진단을 받고 원자력병원 301호실에서 2개월째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나 병세는 더욱 악화, 최근에는 병원에 머무를 필요조차 없어 집에 돌아와 하늘의 뜻만 기다리는 시한생명의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병원당국과 안 기자의 간병을 맡고 있는 동료들의 얘기에 의하면 안 기자가 간암선고를 받은 것은 출옥 직후인 지난해 12월17일. 당시 3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병원 측의 진단이고 보면 안 기자는 앞으로 1개월을 넘기기가 어려운 상태라는 게 주변의 얘기다.
그러나 2월13일 필자가 안 기자의 입원실에 들렀을 때 의외로 초연한 안 기자의 모습을 보고 조금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기자의 어느 구석에서도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과 두려움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침착하고 의연한 안 기자의 태도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라기보다는 곧 회복되어 퇴원하려는 건강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기자는 필자를 대하자 투병 얘기보다는 먼저 해직기자 문제와 현 언론계에 대해 침착하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10·26사태 후 몇몇 신문에서 반성하는 글이 나오는 등 언론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구체적인 행동의 표시가 없어 아쉽습니다. 70년대 우리 언론의 가장 큰 희생자인 동아·조선 해직기자들이 복직되지 않고 어떻게 언론이 반성하거나 회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언론계는 해직기자의 복직문제를 스스로의 의무로 알고 뜨거운 성원과 구체적인 실천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안 기자는 이어 동아 해직기자들의 현재 입장과 태도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해직언론인 110여명은 단결된 힘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왔고 항상 정의와 진리의 편에서 싸워왔기 때문에 사회 각계로부터 격려와 성원을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복직되어야 하며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가르침이라고 확신합니다. 사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볼 때 동아일보에 남아있는 사람이나 저희들이 다같은 희생자라고 봅니다. 이제 동아일보 경영진이나 남아 있는 사람, 그리고 나와 있는 사람들이 다함께 손을 잡고 좋은 신문을 만들어 국민들에 보답해야 할 때입니다.”
안 기자는 또 동아 해직기자들의 지난 5년간의 발자취를 회고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있다고 술회했다.
“70년대 한국언론사에서 동아·조선 해직언론인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무엇으로 메울 수 있었겠는가라는 어느 동료기자의 글을 읽고 제자신 지난 5년을 성찰해보았습니다. 우리가 겪은 지난날의 고난은 자유언론과 민주를 위해 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의 속죄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언론인들은 언론의 자유가 결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라는 극히 상식적인 진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는 끝으로 자신의 현재 투병심경을 “이미 생사를 초월, 모든 것이 안정되고 편안함속에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난 5년간의 생활처럼 기어이 병상에서 일어나 신문사에 복직하여 신문을 만들겠다”고 강렬한 투병 의지를 보여주었는가하면 가족문제에 대해서는 “아내와 두 자식들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있다”고 하여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을 보여주기도 했다….


안종필은 해직기자들의 고난은 유신독재 치하에서 수난을 당한 모든 사람에 대한 속죄라며 좋은 신문을 만드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동아일보에서 쫓겨날 때부터 줄곧 동료들에게 우리는 언론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언론인이라며 펜과 마이크를 다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화의 희망이 찾아오면서 복직의 기대가 부풀고 있었다. 죽음이 눈앞에 왔는데도 안종필은 복직해서 좋은 신문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놓지 않았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동아투위 자유언론운동 13년사』, 1987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다섯수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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