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8년 2월27일부터 사흘간 안종필은 집 밖을 나서지 못했다. 가택연금을 당한 것이다. 경찰은 상부의 지시라며 가택연금을 통보하고 24시간 감시했다. 집 밖에 경찰차를 세워두고, 사복경찰 3~4명을 배치했다. 동아투위 위원장이 된 뒤로 기관원들은 안종필이 누구를 만나는지 감시의 눈길을 번뜩였다. 이른바 ‘담당’은 걸핏하면 찾아왔고, 동네 목욕탕에 가거나 이발소에 들를 때도 따라왔다.
이광자는 약국 앞을 수시로 맴도는 기관원을 볼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증언했다. “정보부 직원들은 약국을 배회하면서 감시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약국 앞을 지나다니며 약국에 누가 드나드는지 살폈다. 남편이 집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에 불안했다.”
3·1절이 다가오자 재야인사들의 시국 선언과 성명서 발표를 우려한 당국은 3월1일을 전후해 불법적인 연행·연금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동아투위에선 안종필, 이부영, 박종만이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 무렵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일을 하던 안성열은 2월 초부터 6개월이 넘도록 매일같이 경찰의 밀착감시를 받았다. 안성열이 항의할 때마다 경찰은 상부의 지시를 따를 뿐이며 우리도 죽을 지경이라고 답했다.
안성열은 1961년 4월 동아일보 공채 3기로 입사했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한 장윤환이 입사 동기다. 고려대 상과대학 상학과 출신인 안성열은 근무가 끝나면 기사 배치와 편집을 연구하기 위해 신문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집으로 직행하는 기자였다. 정치부로 옮겨선 정국의 추이를 정확히 짚어내는 해설기사로 이름을 떨친 엘리트 기자이자 동아일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선택받은 기자’로 통했다.
1972년 10월17일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동아일보에서 잘 나가던 엘리트 정치부 기자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비상계엄으로 일체의 정치 및 정당활동이 금지됐고, 대학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신문과 방송은 계엄사령부의 사전검열을 받고 뉴스를 내보냈다.
당시 정치부 선임이던 안성열은 말진 기자와 한 조가 되어 서울시청에 차려진 계엄사 검열단을 들락거렸다. 다른 신문사 기자들도 한 줄로 늘어서서 검열을 기다렸다. 보안사 군인들은 신문 대장에 붉은 사인펜으로 줄을 긋거나 ‘X’ 표시를 해서 난도질을 했다. 이 굴종의 행렬에 오가면서 안성열은 젊은 기자들과 어울리며 뜻을 같이했다.
안성열은 1973년 3월 편집권 독립 등을 요구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의 연판장 서명을 주동하고, 이듬해 동아일보 노조 결성,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등에서 결정적인 추진력을 발휘했다. 술 한 잔 못하면서 젊은 기자들에게 술과 밥을 사고, 갈현동 집으로 젊은 기자들을 불러모아 자유언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기자들의 배후로 찍힌 그는 정치부에서 밀려나 기획부 등을 전전하다가 1975년 3월8일 해고됐다. 동아일보가 경영난을 이유로 심의실, 과학부, 기획부, 출판부를 없애고, 이들 부서에 소속된 18명을 한꺼번에 해임할 때다.
1978년 들어 안성열이 경찰의 집요한 감시에 시달린 건 한국인권운동협의회’ 활동 때문이었다. 인권운동협의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주도로 인권·민권 운동을 하는 25개 단체가 1978년 1월24일 결성한 단체였다. 안성열은 1977년 12월 초 조남기·조승혁 목사, 오태순 신부, 이우정 교수와 함께 인권운동협의회 설립 5인 준비위원으로 참여했고 결성 직후부터 총무로 일했다. 그해 5월 안종필 위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동아투위는 종교계, 재야, 지식인 그룹의 민주화운동 세력과 연대해 반독재투쟁에 동참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리했는데, 인권운동협의회 참여는 그 일환이었다.
인권운동협의회는 1978년 2월27일 ‘우리의 인권현실’과 ‘한국국민의 인권헌장’을 발표했다. 동아투위 안성열, 박종만, 홍종민, 성유보가 문안을 기초했다. ‘우리의 인권현실’은 한국의 구속자 문제,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 종교자유의 문제, 언론자유 문제, 노동문제, 농민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모든 근원적인 인권유린사태가 조속히 해소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안성열은 2월25일 오후 청진동 동아투위 사무실을 나서다 정체불명의 기관원들에 연행됐다. 경찰은 서대문구 갈현동 그의 집에 형사 3명을 보내 책·원고, 각종 유인물 등을 압수해 갔다. 닷새 동안 조사를 받고 풀려난 안성열은 “인권운동협의회에 관계된 모든 일을 샅샅이 캐물었으며 최근에 발표된 모든 유인물을 제작한 책임자로 나를 몰아 세우려 했다”고 동료들에게 말했다. 안성열은 3월16일에도 개신교와 가톨릭 성직자 4명과 함께 또 한 차례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경찰은 7월 초 ‘민주주의국민연합’ 발족을 전후해 안성열과 박종만을 5일 동안 가택 연금시키고, 장윤환·박지동·임채정·문영희·이종욱·이부영·김종철·정연주 등을 연행해 조사했다. 7월6일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이틀 전 재야인사들은 반 유신독재 연합전선인 ‘민주주의국민연합’을 발족했다. 국민연합은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발기대회를 갖고 발족성명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중앙정보부와 경찰은 윤보선, 함석헌 등 수십 명을 가택 연금시켰다. 이때 동아투위 사람들도 연행되거나 가택연금 당했다.
당국이 동아투위에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는 와중에 몇몇 위원들이 원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났다.
1978년 6월19일 강원도 원주 원동성당에서 김지하 시인 석방을 위한 미사가 열렸다. 동아투위에서 박지동·이부영·임채정·정연주·김종철이 참석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인 고은, 소설가 이호철·송기원과 통일당 선전부장 전대열이 동행했다. 이날 미사는 원동성당을 가득 메울 정도로 성황이었다. 이들은 이튿날 오후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이른바 ‘반체제 가요’를 불렀다는 이유로 형사들에게 체포돼 원주경찰서에서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헌병대와 보안사를 거쳐 즉결심판에 회부된 이들은 6월22일 오후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 법정에 섰다. 안종필은 소식을 듣고 원주로 내려가 김지하 시인 모친 정금성 여사, 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이창복 등과 함께 방청석에서 재판을 지켜봤다. 이날 재판 최후진술에서 정연주는 이 한마디를 했다. “이 재판은 한마디로 좆같은 재판입니다.” 판사는 정연주 등 9명에게 30일 구류 처분을 선고했고 그들은 다시 원주경찰서 유치장에 수용됐다.
정연주는 2011년에 펴낸 <정연주의 기록>에서 ‘원주 반체제 가요’ 사건의 전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버스가 터미널을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에 앉아 있던 소설가 송기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뿌리파’라 불리던 운동 가요였다.
“우리들은 뿌리파다, 좋다 좋아.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좋다, 좋아. 무릎을 꿇고서 사느니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우리들은 뿌리파다.”
그 다음부터는 첫 소절을 바꿔서 불렀다.
“유신독재 물러가라, 좋다 좋아…… 박정희는 물러가라, 좋다 좋아…… 긴급조치 철폐하라, 좋다 좋아……”
우리는 버스 안에서 ‘박정희는 물러가라’ ‘유신헌법 철폐하라’고 노래 불렀다.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은 이 ‘끔찍한 노래’에 공포감마저 드는 모양이었다.
버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톨게이트로 들어서지 않고 그 옆 공간으로 몸체를 돌렸다. 얼마 지니지 않아 원주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우리는 원주경찰서에서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긴급조치 9호에 따르면, 우리는 그것을 수없이 위반한 셈이다.
되풀이되는 감시와 미행, 연행은 안종필 등 10명이 1978년 11월, 이듬해 1월 투옥되는 서막에 불과했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동아투위자유언론운동 13년사』, 1987
◎ 자유언론실천재단 홈페이지, 고 안성열 동지 추모글(장윤환, 박종만, 이부영)
◎ 성유보, 『미완의 꿈-언론인 성유보의 한국 현대사』, 한겨레출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