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시대, 언론 자유가 감옥으로 간 사건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 안종필 평전]
㉕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일지'

1978년 10월 안종필 등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동아투위 위원들이 청진동 투위 사무실 앞에 모여들었다.

1978년 10월5일 저녁 7시쯤 종로구 청진동 동화빌딩 303호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다가오는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돌 기념식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안종필, 홍종민, 박종만, 정연주, 홍종민, 임채정, 안성열 등은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이야기를 나눴다. 정보기관이 도청할 수 있어 사무실에선 늘 라디오를 틀어놓는 게 습관이었다.

그날 상임위원회에선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1년 동안 일어난 학생 시위, 노동운동, 농민운동, 재야의 움직임 등을 모아 일지로 만들어 10·24 선언 4돌에 맞춰 발행할 <동아투위소식>에 싣기로 했다.

동아투위는 1975년 3월 결성 이후 매달 <동아투위소식>을 발행해왔는데, 1978년 6월부턴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의 ‘우리의 교육지표’ 성명 발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 단식, 인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연행 등 언론이 일절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 사건들을 싣기 시작했다. 비록 펜과 마이크를 빼앗겼지만, 언론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언론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몸부림이었다.

10월24일 서울 명동 한일관에서 10·24 선언 4돌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배포된 <동아투위소식>에는 ‘진정한 민주·민족 언론의 좌표’라는 글과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 사건일지(민권일지)’이 실려 있었다. ‘민권일지’는 필경 등사기로 만든 4쪽짜리 유인물로 1977년 10월부터 1년 사이 발생한 사건을 아무런 논평 없이 간단하게 기록한 것이었다.

1978년 7월 치를 보면 다음과 같다.

▲<3일> 부산대학생 이상경 이희석 김성년 군 등 3명이 학교운동장 스탠드에 페인트로 교련철폐 등 반정부 구호를 써 놓았다는 혐의로 구속
▲<4일> 조선대학생 김용출 박형준 양희승 유제도 군 등 4명이 반정부유인물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구속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각계 인사 연금사태-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일을 이틀 앞둔 4일 밤 10시경부터 소위 반체제 인사 100여명에 대해 특별한 이유 없이 가택연금을 일제히 시작. 8일 밤 10시까지 4일간 계속
▲민주주의국민연합 발족-5일 윤보선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 각계 인사 300여명이 민주주의국민연합을 발족. 당국의 방해와 각계 인사 연금 사태로 창립총회는 무산. 문 목사를 비롯(5일~19일) 가입자 전원에 수사기관서 조사
▲전주교구 가톨릭 신부들 시위-5일 오후 전주교구 신부 30여명은 당국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부들에 대해 미행 감시 등 불법적 처사를 저지르는 데에 항의, 가톨릭 성당 옥상에서 시위
▲전주 파티마성당에 경찰 난입-7월6일 밤 10시반경 파티마성당에 경찰이 난입. 신부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문정현 신부를 연행. 전날의 시위와 관련, 경찰은 이날 오후부터 문 신부를 연행하려 하였으나 문 신부의 거부와 동료 신부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기동타격대까지 동원. 사제관 창문을 부수고 난입. 항의하던 박종상 신부는 경찰에 맞아 중상
▲<18일>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들 14명이 인천지원 법정 뜰에서 회사측 증인들과 시비 끝에 경찰에 연행. 이중 7명이 20일씩 구류

1978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식에 배포한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 일지'.

이처럼 사건을 기록하고 일지 형식으로 모아 만든 유인물에 불과한 ‘민권일지’로 동아투위 10명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홍종민 시작으로 안성열·박종만·안종필 연행
10월24일 10시쯤 기념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홍종민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홍종민의 연행 소식을 들은 안종필은 다음날 오전 긴급 상임위원회를 소집했다. 동아투위에 대한 직접적 탄압이 가해지고 있음을 중시하고 곧바로 사무실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홍종민의 연행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10월26일 오전 10시 안성열, 12시30분 박종만, 밤 8시15분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안종필을 끌고 갔다. 안종필은 연행에 앞서 농성 중인 동료들에게 “현재의 이 박해와 탄압은 오히려 우리 투위의 단결을 더욱 굳건하게 할 뿐이다.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자유언론을 쟁취하려는 그날까지 의연히 싸우자”고 말했다.

안종필은 종로경찰서 형사보호실에 머물며 경찰 조사를 받았다. 형사보호실에는 먼저 연행된 홍종민, 안성열, 박종만이 있었다. 형사들은 <동아투위소식> 제작 경위에 집중했다. 누가 썼고, 민권일지에 실린 자료는 어떻게 모았는지 등을 캐물었다.

당시 연행됐던 박종만은 이렇게 기억한다.

“처음 연행될 때 사건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키울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잡아다 좀 겁주고, 유인물 못 만들게 하려나 했죠. 형사들도 우리를 조사하면서 농담하고 실실 웃기도 했거든요. 젊은 시절이라 그랬나. ‘잡아가면 잡혀가고, 구속하면 구속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러다 풀어주겠지라는 생각에 형사보호실에서 여러 날 보내면서도 느긋했어요. 설마 구속할까 했는데, 6명을 한꺼번에 구속하더군요.”

'민권일지사건'이 일어나자 동아투위 위원들과 재야인사들은 청진동 투위 사무실 앞에서 항의 도열시위를 벌였다.

동아투위는 밤에는 사무실 농성, 낮에는 사무실 앞길에서 침묵시위를 하며 경찰의 탄압을 비판하는 성명을 연달아 냈다. 10월27일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모아 연행된 우리의 위원장 안종필 동지를 비롯한 모든 동지가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영원한 이념인 ‘자유언론’이 꽃필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10월30일에는 ‘현역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했다. “비민주적인 헌법은 철폐되고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긴급조치는 해제되어야 한다고 부르짖던 학생과 시민들은 차디찬 감방에 던져지고 있는” 등 언론이 당연히 보도해야 할 사건들이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데도 언론은 침묵하고 있다면서 “어둠을 뿌리는 공모자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을 것”을 촉구했다.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종로경찰서 형사들은 10월28일 사무실과 박종만의 집을 수색해 ‘민주인권사건일지’ 자료 등을 압수했다. 30일 오전에 또 사무실에 들어와 ‘현역 언론인들에게 보내는 글’ 500여장과 등사기를 압수했다. 그리고 오후 5시쯤, 장윤환 이규만 임채정 정연주 이기중 김종철을 차례로 연행했다.

11월10일 안종필 홍종민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김종철이 구속됐다. 서울형사지법 수석판사 한정진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6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보호실에 머물던 안종필과 동료들은 유치장에 수감됐다. 이규만 임채정 이기중 정연주 등 4명은 불구속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사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정연주를 11월27일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1979년 1월15일 윤활식, 이기중, 성유보가 송년특집 <동아투위소식>을 제작, 배포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성유보는 1975년에 이어 두 번째 구속됐다. 이로써 1978년 10월부터 1979년 초까지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

성유보 등 3명을 구속한 송년특집 1978년 12월27일자 <동아투위소식>엔 ‘자유 언론은 영원한 실천과제’라는 성명이 실렸는데, 성명 내용은 이러했다. “민중의 부르짖음이 현 제도언론의 외면으로 역사의 지평 너머로 함몰되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사실을 사실대로 역사에나마 기록으로 남기고자 몇백부 만들어 돌려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있는 사실을 있다고 기록한 것이 죄가 되어 옥고를 치러야 하는 이 땅은 이미 역사를 잃은 땅이다.”

◇이돈명 등 변호사 22명 무료 변론
동아투위는 10명의 구속 사태를 ‘유신 시대 언론자유가 총체적으로 감옥으로 간 사건’이라 불렀다. 동아투위는 이부영을 간사로 한 ‘법정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전국에서 22명의 변호사가 무료 변론에 나서주었다. 서울의 김재형, 박세경, 홍현욱, 이돈명, 태윤기, 김춘봉, 이범열, 용남진, 정춘용, 이세중, 김교창, 조준희, 박두환, 이돈희, 하경철,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 광주의 홍남순 변호사, 부산의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 등이 그들이었다.

안종필, 홍종민,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김종철 6명은 11월16일 검찰에 송치되고,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정연주는 11월29일 검찰에 구속, 송치됐다. 검찰은 7명을 4개의 독립된 사건으로 분리해서 서울형사지방법원에 기소했다. 검찰은 11월24일 안성열을, 11월29일 장윤환, 김종철을, 12월4일 안종필, 홍종민을, 12월5일 박종만, 정연주를 각각 분리해 기소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도 이 사건을 2개씩 묶어 각각 다른 재판부에 배당했다. 안종필과 홍종민, 박종만과 정연주는 서울형사지법 합의 12부(재판장 김형기 부장판사)에, 안성열과 장윤환·김종철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한정진 수석부장판사)에 배당했다.

같은 사건인데도 검찰이 분리 기소하고 법원이 분리 배당한 속셈은 유인물 제작 배포라는 경미한 사건으로 지식인을 7명씩이나 한꺼번에 구속 기소했다는 국내외 지탄을 피하고, 변호인의 선임 및 법정투쟁을 약화시키며, 민주인사들의 방청을 가능한 한 사전에 봉쇄하려는데 있었다.

안종필, 홍종민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용 법조: 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1항 가호, 나호, 라호, 2항, 7항,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제4조 1항, 제14조 1항

공소 사실: 피고인 안종필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이며, 홍종민은 동 위원회 총무인 바,
1. 피고인 안종필, 동 홍종민 등은 1978년 10월5일 오후 7시경 서울 종로구 청진동 291-1 소재 동화빌딩 303호실에서 개최된 동 투위 정기상임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10월17일 정기월례회와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식 등을 기하여 특집형식으로 유인물을 제작·배포하기로 하고 동 안종필이가 그 유인물의 초안 작성을 같은 회원인 안성열, 박종만 등에게 부탁하고 동월 14일에 동 안성열로부터 10월17일자 <동아투위소식>이란 제하의, 동 박종만으로부터 10월24일자 <진정한 민주민족언론의 좌표>란 제하의 각 원고를 제출받아 그 내용을 수정, 검토할 때 그 속에는 사실을 왜곡하고 현행 헌법을 비방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음에도 이를 제작, 배포할 것을 기도하고 동 전시 안성열 등과 공모하여

가. 피고인 홍종민은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동 안종필의 지시로
(1) 1978년 10월14일부터 동월 16일 사이에 전시 안성열이가 초안한 원고지에 <재야인사 402명, 10·17 국민선언 발표, 범국민적으로 서명작업을 전개>란 소제목 하에 “▲10월17일 계엄과 잇따른 긴급조치로 민주헌정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국민의 정치참여를 제도적으로 배제한 필연적인 결과로서 부정·특권·타락은 극대화되었다 ▲현행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 또는 박탈하고 입법부와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는 요지의 사실을 왜곡하고 현행 헌법을 비방하는 <10·17 국민선언>을 인용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줄 알면서 이를 등사원지에 필경하여 유인물 150부를 등사 제작하고
(2) 같은 달 16일경부터 19일 사이에 전시 박종만이가 초안한 <진정한 민주민족언론의 좌표>란 제하의 원고지에 “▲지금 우리 사회에 있어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에 대한 가장 큰 장애요소는 유신헌법과 그에서 파생된 긴급조치이다 ▲우리가 진정한 민주민족언론으로서 언론자유와 사실보도의 권리를 갖고 다시 현역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제도와 법이 당연히 철폐되어야 한다”라는 취지의 대한민국 헌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비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도 이를 등사원지에 필경하여 유인물 160여부를 제작하고

나. (1) 1978년 10월17일 12시경 서울 종로구 청진동 소재 한일관에서 개최된 동 투위 월례회 석상에서 참석위원 40여명에게 1의 가 유인물을 배포하고 불참위원 72명에게는 우송배포하고
(2) 같은 달 24일 19시경 서울 중구 명동 소재 한일관에서 개최된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 기념식 석상에서 참석위원에게 1의 나 유인물을 배포함과 아울러 같은 위원인 이규만으로 하여금 낭독케 하여서 사실을 왜곡하고 대통령긴급조치 9호를 비방함과 동시에 대한민국 헌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내용이 포함된 표현물을 제작, 배포하고
2. 피고인 안종필은 소할관서에 등록함이 없이 1977년 4월17일경부터 1978년 10월 중순경까지 사이에 서울 종로구 청진동 291-1 소재 동화빌딩 303호실의 동아투위 사무실에서 매월 17일자로 <동아투위소식>이란 제하의 유인물 120매 가량을 발행하여 회원에게 송부해 줌으로써 정기 간행물을 발행한 것이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2014, 다섯수레
◎ 성유보, 『미완의 꿈-언론인 성유보의 한국현대사』, 2015,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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