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언론인들은 처음 두세 달은 각계의 도움으로 버틸 만했다. 그러나 실직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생활고가 닥쳐왔다. 3월18일부터 9월17일까지 6개월 동안 일요일만 빼고 비가 오는 악천후에도 계속된 동아일보사 앞 침묵시위를 끝낼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였다.
거리의 언론인들은 생계를 이을 수단으로 6월17~18일 서울 명동 YWCA 마당을 빌려 바자회를 열었다. 윤보선, 김대중, 김영삼, 법정스님, 천관우 등이 손수 쓴 글씨와 여러 가지 작품들을 출품해주었다. 바자회는 2000여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바자회 성공에 고무된 동아투위는 신용조합 형태로 잡화류 백화점을 열기로 했다. 신문로 옛 경기여고 뒤편 건물 2층을 계약하고 8월1일 개업한다는 인사장도 돌렸다. 그런데 개업 이틀 전날 건물주인이 “경찰서에 갔다 왔다 하느라 귀찮아 못살겠다”며 건물 출입구를 모두 잠그고 잠적해 잡화점 계획은 무산됐다.
1975년 6월 중순쯤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장로교연합회가 발행하는 잡지 ‘A·D(Anno Domini)’는 6월24일 ‘러브조이 언론자유상’을 동아투위에 수여했다. 이 상은 1837년 미국 일리노이주 엘튼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다가 항의 군중의 신문사 습격 때 희생된 장로교 목사 엘라이자 패리쉬 러브조이를 기리기 위해 1973년부터 해마다 시상해왔는데 외국인이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동아투위가 처음이었다.
1975년 10월24일을 기준으로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기자, PD, 아나운서는 모두 115명에 달했다. 3월에만 49명이 해고됐고, 무기정직처분을 받은 사원들 가운데 9월27일에 6명, 10월11일에 61명이 추가로 해임됐다. 해직 당시 평균 연령은 33세였다.
실직한 거리의 언론인들은 돈벌이에 뛰어들어야 했다. 출판이나 번역, 편집 일을 찾고 옷가게, 과일가게, 스낵가게, 배관가게, 양품점을 차렸다. 책상물림들인 이들에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장사를 시작했지만, 상술이 없었던지 가게는 오래 못 가고 문을 닫기 일쑤였다. 뻔질나게 가게로 찾아오는 정보기관 관계자들의 회유와 협박도 고역이었다.
동아투위가 1975년 12월에 펴낸 유인물 ‘동아투위소식’은 직장에 들어가 월급을 받는 사람이 35명가량, 장사나 기타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 25명가량이며 나머지 절반가량은 아직도 일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고 기록한다. 이 유인물엔 각자 생계의 현장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기자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서울시내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는 양복점 판매원 S 형, “복덕방 수업 두 달 만에 부동산 평론가가 됐다”는 M 형, “서툰 솜씨로 작두질을 하며 한약 썰기에 바쁜” L 형, “두 달 동안 세 번이나 일자리를 옮긴” P 형, “백화점에 보세품 스웨터를 납품하고 있는데 백화점 상인들의 텃세에 신세타령이 절로 나온다는” 보따리장사 L 여사, “살던 집은 전세를 주고 방 한 칸 딸린 구멍가게를 얻어 양품점을 냈다”는 J 형, “제약회사 과장이 된 뒤 동료들에게 술을 사주느라고 첫 월급을 몽땅 썼다”는 S 형….
이처럼 먹고 살기 위해 찾은 밥벌이는 낯설고 몸에 익지 않아 고달팠다. 고정적인 취직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매우 드물었고 취직과 실업을 되풀이했다. 경력을 활용해 일할 수 있는 신문과 방송 등 언론사는 아예 받아주지 않았다. 기업체 취업은 언감생심이었다. 작은 일자리도 구하기 힘들었고, 찾았다 하더라도 당국이 갖은 압력을 가해 일자리를 잃기도 했다.
일자리가 없는 동료들끼리 모여 번역을 했다. 그렇게 해서 1976년 4월 ‘종각번역실’이 문을 열었다. 외신부 차장 출신 이인철의 동생이 운영하는 종각 맞은편 치과병원 옆방에 사무실이 있었다. 이인철이 실장을 맡고 장윤환, 이계익, 우승용, 박지동, 황의방, 박순철, 이종대, 김종철, 송재원, 정영일, 정연주, 조영호 등이 번역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최후를 기록한 ‘죽음 앞에서’를 비롯해 ‘말콤 엑스’, ‘소유냐 존재냐’, ‘뿌리’, ‘마찌니 평전’,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등을 공동 번역했다.
‘종각번역실’처럼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기자들이 함께 일한 곳이 또 있었다. ‘주간시민’이었다. 이 잡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이 서울시장 시절 창간한 시정 홍보지였다. 그가 서울시장을 그만두자 이 잡지는 보르네오통상 위상욱, 다시 중앙대학교 재단으로 넘어갔다. 주간시민 발행인을 맡은 중앙대 교수 이달순은 동아투위 이계익을 편집장으로 초빙했다. 우리나라 최초 여기자인 최은희의 맏아들인 이달순은 이계익과는 양정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이계익은 동아투위 이종덕, 이기중, 김언호, 김성균, 이영록, 이종욱(李宗郁)을 편집국에 모았다. 1975년 늦가을이었다. 그 후 동아일보 해임 당시 경제부 기자였던 이종욱(李鍾旭)이 들어와 이계익 후임으로 편집장을 맡아 박종만, 이태호, 유영숙과 함께 잡지의 환골탈태를 이끌었다.
안종필은 1976년 1월5일 아침 동아일보사 정문 앞으로 나갔다. 혹한에도 불구하고 많은 동료가 나와 있었다. 그들은 1시간가량 도열시위를 하고 6개월 동안 하던 습관대로 신문회관까지 침묵행진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거리의 언론인들은 그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했던지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안부를 묻고 팍팍하더라도 이겨내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안종필은 1975년을 “참으로 피눈물 나는 1년이었다”고 썼다. 동아투위 결성 1년을 맞아 1976년 3월 ‘동아투위소식’에 실은 글에서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겪은 일은 그야말로 형극 바로 그것이었다”면서 “우리가 겪은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남아야 했기에 각자의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고 했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 『자유언론 40년』, 2014, 다섯수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