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직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TV를 지켜보다가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의 질문에 내 귀를 의심했다. “북한 지도자가 언제 또 회담장에 나와서 필요한 조치를 취할지 아직까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대북 제재를 더 강화해서 더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할 생각입니까?” 트럼프 대통령은 “그건 답하고 싶지 않다”면서도 “현재 굉장히 강력한 제재가 있는 상황에서 더 필요하지 않고 북한 주민들도 생계는 이어가야 한다”고 답했다.
더 부끄럽게 느낀 것은 다음 날 <동아일보> 기사였다. ‘아이돌급 외모로 인기…트럼프에 돌직구 질문’이란 제목으로 자화자찬을 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트럼프 대통령을 긴장시켰다’고 썼는데,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긴장시키는 질문이 나오면 답변을 더듬거나 뜸을 들이기 마련인데, 트럼프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반박을 했다. 답변이 아니라 ‘뭐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면박을 한 것이다.
우리 언론의 부끄러운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3월에는 영국 BBC 로라 비커(L. Bicker) 서울특파원이 SNS를 통해 “내가 쓴 기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없다”며 이를 왜곡 보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비판했다. 당시 두 신문은 교묘하게 원문 일부를 빼거나 조작해 문 대통령이 한국에서 받는 양극의 평가를 마치 BBC의 평가인 양 서술했다.
2014년 4월, ‘세월호 피해자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는가 하면 금방 구조된 학생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는 등 재난 보도의 기초도 모르는 기자들을 대중은 ‘기레기’라는 멸칭으로 조롱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 9월, 서울 G20정상회의 폐막식에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연설 직후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 우선권을 주고 통역까지 된다고 했지만 아무도 질문을 못 해 중국 기자에게 질문 순서를 뺏긴 일도 있다.
며칠 전에는 <동아일보> 대기자가 ‘빨갱이를 빨갱이라 부르지 못하는 나라’라는 칼럼을 썼는데, 내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빨갱이’란 낙인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켰고 지금도 우리 사회를 갈갈이 찢어놓고 있는지 모르진 않을 터인데… 일본에서 건너온 ‘빨갱이’란 말은 일본에서도 ‘죽은 말’이 됐고, 매카시즘은 원조 국가인 미국에서도 사라졌다.
저널리즘을 배우기 위해 날마다 신문을 정독하고 방송을 모니터하는데 기자와 논객의 참신한 관점과 필력에 반하거나 주눅들 때가 많다. 그러나 기사에 실망해 기자가 되기도 전인데 직업에 회의감이 들 때도 많다. 우리나라 기자는 언제쯤 ‘기레기’라는 멸칭을 떼고 대중에게 온전히 ‘기자’로 불리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