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민중과 지식인

[언론 다시보기] 권태호 한겨레신문 출판국장

권태호 한겨레신문 출판국장.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은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대학 들어오자마자, 선배들이 맨 처음 내민 책이 <민중과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사회와 민중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책이 처음 나온 1978년,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18.4%였다. 당시로선 ‘대학생=지식인’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때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년이란 말도 아직 낯선 스무 살짜리가 갑자기 지식인의 책무를 요구받는다는 게 다소 당혹스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90년대 초반, 기자가 됐을 때도 비슷한 분위기를 경험했다. 지적 수준은 그대로인데, 하루아침에 ‘사회의 공기(公器)’의 일원이 되어, 언론인의 책무를 되새겨야 했다. 언론이 정보의 유통을 독점하던 시대였기에 그러했다.


그런데 이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실어 펼 수 있는 ‘만인 기자 시대’다. 유튜브 이후, ‘만인 미디어 시대’로까지 나아갔다. 과거 정보의 양과 도착 시간차에서 발생했던 ‘민중과 지식인’, ‘독자와 기자’의 구분은 이제 모호하다. 입법·사법·행정을 감시하는 언론이 제4부라면, 대중은 이제 제5부다.


유시민이나 홍준표 아니어도, 유튜브와 페이스북에는 수많은 대중들이 뉴스와 논평을 쏟아낸다. 과거 언론의 역할을 이들이 분담하고 있다. 언론계 필독서로 꼽히는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2014)을 보면, 정보 과잉의 현시대 기자의 역할로 3가지를 들고 있다. 진실 확인자(Authenticator), 의미 부여자(Sense maker), 목격자 역할(Bear witness) 등이다. 먼저 ‘진실 확인자’가 되려면, 정파·상업적 목적을 위해 자신이 소유 또는 소속된 매체를 도구화 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신뢰성으로 자주 표현된다. 언론의 신뢰성이란, 설령 자신이 믿거나 원하는 바와 현상이나 사실이 다르더라도, 이를 진실되게 전할 때 조금씩 조금씩 쌓여나갈 것이다. 지금은 계속 허물어뜨리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사안을 어떻게 봐야할 지 혼란스러운 때, 언론이 맥락을 풀어 설명해 주는 ‘의미 부여자’가 되려면, 그만큼의 경험과 실력을 갖춰야 한다. 똑똑한 이들을 뽑아 그냥 방치했던 언론사들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기자들에 대한 체계적 교육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 의미 부여자의 역할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목격자 역할’의 독점이 깨진 현시대에, 언론의 ‘목격자 역할’은 역설적으로 더 중요해 지고 있다. 직업적 기자들이 온 시간을 투여해 목격한 바를 충실히 전달해야, 유튜버나 페이스북 논객들도 그 부자유한 사실(fact)의 토대 위에서 자유한 의견(opinion)을 말할 수 있다. 기존 언론에서도 오피니언면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그래도 뉴스가 있어야 의견도 있다.


그리고, ‘만인 기자, 만인 미디어 시대’에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뉴스 출처와 근거를 밝히고,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사실관계가 잘못됐을 때 곧바로 이를 시인하고 수정하는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 외부를 향해 소리를 내는 그 누구에게도 책무로 지켜져야 할 것이다. 지금은 민중과 지식인이 나뉘지 않고, 모두가 지식인인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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