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공사관 환수는 주권회복의 완성"

여론형성 등 공사관 매입 기여 공로로 국민훈장 받은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  
 

워싱턴 DC 중심인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요지. 대한제국의 공사관 앞에 선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한 세기가 넘은 빛바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오른쪽 위에는 ‘大朝鮮 駐箚 美國 華盛頓 公使館(대조선 주차 미국 화성돈 공사관)’이라고 써있었다. 화성돈은 워싱턴의 한자어. 일제치하, 해방, 6·25, 산업화와 민주화, 우리 역사의 격동 속에 잊힌 건물은 사진의 모습 그대로였다.


“틀림없다. 130년이 된 빅토리아풍 건물이 온전하게 살아 있었다. 당시의 감격, 충격, 비감(悲感), 여러 상념이 나를 한참 붙잡았다.”


박보균 중앙일보 대기자가 지난달 20일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우리정부가 공사관 매입 여론을 형성하고 실제로 성사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박 대기자는 2000년대부터 이후 20차례 이상 현장을 방문해 자료를 수집하고 칼럼과 강연을 하며 역사적 의미를 전파했다.


박 대기자는 정부의 공사관 매입에 대해 “주권 회복의 완성”이라고 했다. “공사관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한 주권 강탈의 상징이다. 1970년대 그 건물이 있는 로건 서클 일대가 역사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재건축, 증축을 못하게 됐다. 이런 역사의 결정적인 행운은 우리 세대에 교훈과 통찰을 주기 위해서다.”


공사관은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자주 독립외교의 야망과 비장한 집념이 주입된 것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4년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한반도 격랑이 계속되면서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약육강식 무대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고종은 미국에 눈을 돌린다. 용미(用美)외교를 구상, 설계한 것이다.
1883년 민영익의 보빙(報聘)사절단, 1887년 11월 박정양(朴定陽) 파견, 1888년 1월 백악관에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에 신임장을 제정했다. 그리고 그 건물을 1891년 1월에 샀다. 4대 공사(임시서리공사) 이채연 때다. 고종은 황실의 통치자금인 내탕금(內帑金) 2만5000달러를 냈다. 물가 인상 등을 감안 할 때 최소 127만 달러, 최대 200만 달러 정도다. 고종은 대미외교에 모든 것을 걸었지만 태프트 카쓰라 밀약(7월29일)→제2차 영일동맹(8월12일)→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5일) 휴전 조약의 체결로 미국, 영국,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차례로 손을 뗐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넘어가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된다. 워싱턴의 김윤정 공사가 공사관 건물을 일본에 넘겨주며 대미외교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이처럼 공사관의 역사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매입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소요됐다. 1980년대 후반 김원모 교수가 그 건물의 존재를 한국에 알린 이후 10여년이 지난 후에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학계 일각의 허술하고 게으른 역사의식, 관료적 무사안일 때문에 늦춰졌다. 모 대학에 매입을 권유하기도 하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모두 막판에 “결국 정부가 환수해야 한다”며 거부의사를 표했다. “역사보존을 외치면서 실질(이 건물 매입)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개탄과 울분이 내 마음속에 일었다.”


2009년, 정부는 30억원의 예산을 잡았지만 또 다시 협상에 실패했다. 불용액 처리가 됐다. 예산안에서만 움직였다. 결국 이번에 39억5000만원을 주고 샀다. 다소 비싸게 사지 않았느냐고 묻는 한 정치인에게 박 대기자는 말했다.


“그 건물 내부는 한 세기 전과 그대로다. 벽난로, 창틀, 위로 올라가는 층계 다 똑같았다. 이 일대 비슷한 건물 30여 채 중 내부 수리를 안 한 유일한 집이다. 집 주인(흑인변호사)이 이 건물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식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자고 해도 반대했다. 웃돈을 더 주고 살만했다.”


박 대기자는 후배 기자들에게 “기자는 사실에 대한 관심, 진실 추적의 열정이 제일 중요하다”며 “그런 것을 위해 노력하면 결국 유능한 기자가 된다”고 당부했다. 그는 1981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정치부장·논설위원·편집국장·편집인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내각제 합의각서’ 특종을 했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