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와 ‘임을 위한 행진곡’
어떤 영화, 어떤 장면을 봐도 몰입이 되지 않던 요즘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팝콘을 들고 극장을 찾을 새가 어디 있으랴. 치맥을 준비해놓고 뉴스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 늘고, ‘극장’보다 ‘광장’을 먼저 찾는 게 주말의 풍경이 됐다. 영화 시사회장에서 스치는 기자들과 영화인들은 “얼른 시국이 진정되야죠”로 인사를 시작하고, 배우와 감독들의 인터뷰는 “흥행 라이벌, ‘시국’을 이길 수가 없네요”로 허탈한 마무리를 하곤 한다. 그러다 ‘판도라’를 봤다. 4년 전에 쓰여졌다는 시나리오는 지금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진실 찾기
생각해보면 참 얄궂다. 어쩌면 나라 안팎 상황이 이리도 비슷할까. 영국 옥스퍼드사전이 ‘포스트-트루스(post-truth)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처음 든 생각이었다. 포스트-트루스는 ‘탈진실’ 정도 의미를 담은 단어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 여파로 큰 관심을 모았다.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포스트-트루스’는 한 발 더 들어간다. 물론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일련의 사건 때문이다. JTBC의 손석희 앵커는 이런 우리 상황을 ‘상실의
이 겨울에 읽을 만한 소설 두 권
시침 뚝 떼고, 겨울에 읽을 만한 소설 이야기를 해 보자. 일주일에 소설 한 편 읽을 시간마저 없다면 그게 사는 건가. 나라는 나라대로 바꾸고, 나는 또 나대로 살찌워야 할테니. 우선 읽고 나면 따뜻해지는 단편과 읽는 내내 낄낄거리게 되는 장편을 하나씩 추천한다. 성석제의 ‘믜리도 괴리도 없시’(문학동네)와 천명관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이다. “개의 몸에 기생하는 진드기가 있다. 한 번 박은 진드기의 머리는 돌아 나올 줄 모른다. 죽어도 안으로 파고들어가 죽는다. 나는 그 광경을 ‘몰두’라 부르려 한다.”이게 성석제식…
최순실 게이트…‘지대추구 공화국’의 총체적 재앙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최순실이 주도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53개 기업이 774억원을 출연한 사실이 터져 나오자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이 보인 반응이었다. 최씨의 국정농단은 충격적이지만 기업이 내는 준조세 자체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는 얘기다. 정권별로 주체와 명목, 용처만 달라졌다는 설명이다. 군사정권 때는 ‘통치자금’이란 명목이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각각 9000억원대와 5000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했다. 이후 ‘재단 설립’, ‘국책 사업’ 등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노무현 후보 캠프도 112억원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백서가 필요하다
“박근혜 후보를 찍은 내 손가락이 원망스럽다.”4년 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은 한 지인의 탄식이다. 그와 동일한 선택을 했던 국민 중 상당수가 요즘 살 맛을 잃은 듯하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일반 유권자의 탓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국민들 중에서 실상을 제대로 안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최근 “박근혜 후보 옆에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이 어디 있나.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다”라고 밝힌 것은 그 점에서 충격적이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반 국민들은 몰랐지만, 정
박 대통령, 외교안보도 손 떼야
“역사는 혼이다.”박근혜 대통령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13년 7월 1일 제20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열리고 있던 브루나이에서 윤병세 외교장관이 내뱉은 발언이다. 윤 외교장관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과의 양자회담에서 “역사문제는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한 개인, 한 민족의 영혼이 다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한일 외교장관이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베 정권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촉구한다는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공식 외교 석상에서 쉽게 튀어나올 수 있는 메시지가
배우 윤여정, 그녀의 이야기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라 한다. 취재원들의 말문을 열어야 하는 의무를 띈 기자로서는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할 말임에도, 듣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내기 바쁜 날이 있다. 물론 추임새를 넣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쏟기 바쁜 취재원을 앞에 두고 적잖이 당황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역시 ‘듣기’가 부족한 나의 탓이라 여겨본다. 최근 귀를 두 배, 세 배로 열고도 모자랄 만큼 듣기에 열중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깜짝 놀랄만큼 솔직한 화법이지만 그 안에서 진실함과 진중
객관 저널리즘의 한계 메울 ‘팩트 체크’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핫이슈는 소셜 미디어와 빅데이터였다. 오바마 캠프는 뛰어난 빅데이터 분석 능력을 토대로 맞춤형 선거운동을 펼쳐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렇다면 올해 미국 대선의 핫이슈는 뭘까? 흥행성 떨어지는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두 후보가 이렇다 할 신선한 카드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주요 언론들의 ‘팩트 체크(fact check)’ 시도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달 열린 1차 대선후보 토론 때는 미국 공영방송인 NPR이 실시간 팩트 체크를 해 화제가 됐다. NPR은 구글 독스에 토론 발언을 옮
노벨문학상 야근, ‘쟁이’들의 밤
어쩌면 이 글은 기자협회보에만 어울리는 글이 될 것 같다. ‘선수’들의 푸념이나 사소한 자기만족에 가까운 글이 될 테니까. 주제는 노벨문학상 취재의 그 때와 지금. 16년 전 일이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는 10월의 첫 주 혹은 둘째 주 목요일 밤 8시. 2000년 10월의 그 밤, 나는 10년 선배를 모시고 문학담당 2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임무란 다름 아닌 국제부 텔렉스실에서의 뻗치기다. 편집국에서는 아직 인터넷도 와이파이도 의미 없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지금처럼 각자의 노트북에서 한림원 홈페이지의 생방송을 실시간
한비자(韓非子)가 ‘김영란법’을 말한다
중국 한비자가 집대성한 법가(法家)는 사회적 관계성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됐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사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그대로 두면 공익을 편취해 나라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봤다.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선 상과 벌로 백성과 신하들의 탐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관리를 독려하고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이며 악과 위험을 물리치는 데 형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제자백가의 한 줄기에 불과했던 법가는 진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전격 등용돼 꽃을 피우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