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백서가 필요하다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박근혜 후보를 찍은 내 손가락이 원망스럽다.”
4년 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은 한 지인의 탄식이다. 그와 동일한 선택을 했던 국민 중 상당수가 요즘 살 맛을 잃은 듯하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일반 유권자의 탓으로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국민들 중에서 실상을 제대로 안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최근 “박근혜 후보 옆에 최순실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이 어디 있나.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다”라고 밝힌 것은 그 점에서 충격적이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반 국민들은 몰랐지만, 정치인들 특히 대통령의 주변에 있던 수많은 인사들은 진작부터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다는 ‘자기고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터지기 이전에 범여권을 통틀어 대통령과 최순실(또는 전 남편인 정윤회) 관계의 위험성을 경고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공주와 상궁’에 비유했던 전여옥 전 의원과 정두언 전 의원,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도다.


대통령의 수족역할을 한 ‘문고리 3인방’을 포함한 청와대 비서진, 대통령과 권력을 함께 나누었던 여당 의원과 정부 고위관료들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최순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대통령에게 고언은커녕 물개박수를 쳤다. 마치 ‘벌거숭이 임금님’ 우화에 나오는 신하들처럼. 그 사람들 중에 대표격인 황교안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최순실의 존재를 알았느냐는 야당의원 질문에 “지라시를 보고 알았다”고 답한 것은 정말 ‘영혼은 물론 양심까지 없는 관료’의 표본이다.


지난 3년반 동안 ‘벌거숭이 임금님’의 나팔수와 사냥개 노릇을 충실히 해온 기득권 언론과 검찰도 예외는 아니다. 기득권 언론은 지금은 국정농단의 ‘고발자’ 역할에 충실한 듯하지만, 바로 어제까지는 단물을 함께 나눠 마신 ‘내부자’였다. 검찰 역시 조금 전까지 주인의 손길에 꼬리를 흔들다가 갑자기 물려고 달려드는 비굴한 사냥개일 뿐이다. 최순실 모녀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하며 정경유착을 시도한 일부 재벌도 공범의 리스트에서 빠질 수 없다. “나도 피해자”라는 교묘한 논리로 빠져나가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국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국민의 신뢰에 기반한 통치가 불가능해진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는 결국 시간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최순실이 처벌받는다고 해도, 벌거숭이 임금님의 비위를 맞추며 국민들을 우롱한 수많은 공범들이 여전히 건재하다면, 사상 최대의 헌정유린과 정격유착 사태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재발을 막으려면 성역없는 진실규명과 철저한 책임자 처벌이 필수다. 그 과정에 5년, 10년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졸속으로 처리돼서는 안 된다. 심지어 일정 기간 국정공백으로 인한 혼란과 비효율이 우려되더라도 감수해야 하고, 그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여야 정치권의 책임이다. 그리고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전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백서’로 정리해 역사의 증거물이나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그래서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없애는 국민의 기억 속에서 지우는 것만으로 기득권 유지를 획책하는 내부자들의 시도에 유권자들이 또다시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안전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100만개의 촛불’이 보여준 성숙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제대로 받드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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