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윤리 규범을 만들어 나가야 할 언론의 책임

[언론 다시보기]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심석태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 교수

한 50대 시민이 출근길에 방송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고속도로를 경유하는 광역버스 입석 금지로 인한 불편을 얘기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가 방송되자 초상권 침해라며 언론중재위에 조정을 신청했다. 방송에 내보내지 않기로 하고 인터뷰한 것을 방송했다는 것이다. 새벽같이 취재를 간 기자가 방송하지 않기로 하고 인터뷰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질까? 놀랍게도 언론중재위는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신청인에 대한 사과, 150만원 배상, 동영상 삭제”라는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른바 직권조정이다.


방송사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수긍하기 어렵지만 중재위 결정을 수용하거나, 패소의 위험을 감수하고 소송으로 가는 것이다. 직권조정에 이의를 제기하면 자동으로 언론사를 피고로 하는 소송이 제기된다. 언론사에 불리한 직권조정에 불복했다가는 언론사가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 직권조정을 수용하는 것이 안전하다. 만약 이 방송사가 그냥 직권조정을 수용했더라면 우리 언론에는 제대로 인터뷰를 했어도 서면 동의 없이 얼굴을 내보내면 초상권 침해가 된다는 선례가 또 하나 쌓였을 것이다.


이 사건에서는 언론사가 법원 판단을 받아보기로 했다. 카메라 앞에서 시연까지 하고도 방송에 나가자 초상권 침해를 주장해 승소한 사례들이 여럿 있던 터라 위험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법원은 인터뷰 상황으로 볼 때 방송하지 않기로 하고 인터뷰했다는 원고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런 공익적 사안에 대한 인터뷰가 보도된다고 해서 그가 입을 피해가 보도의 공익적 가치보다 크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방송사 손을 들어줬다. 판결은 대법원까지 가서 확정됐다. 길거리 인터뷰를 하면서 서면 동의까지 받지 않아도 초상권 침해가 되지 않는다는 선례가 하나 마련된 셈이다.


이런 사건이 대법원까지 간 것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원고가 항소심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방송에서 인터뷰한 사람의 얼굴을 다들 가리고 내보내길래 자기도 그럴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워낙 보도에서 등장인물을 모두 익명으로 표시하고, 얼굴도 가리는 것이 기본이 됐기 때문이다. 통신사가 송고한 길거리나 해변 스케치 사진도 사람 얼굴은 모두 흐림처리 되어 있다. 초상권 침해 주장이 잘 통하니 아예 안전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비판적인 언론인이 많다. 중재위나 법원의 기준이 너무 자의적이고 언론의 공익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초상권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업무 관행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준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위의 방송사처럼 기준을 만들겠다며 위험을 감수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소송까지 가는 건 귀찮을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인권에 무신경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윤리적, 법적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언론 신뢰도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익명과 흐림처리를 요구하지만 동시에 그런 것의 남용이 언론의 품질과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금처럼 익명·흐림처리가 기본값인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드물기 때문이다. 중재위나 법원, 시민단체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기준을 돌아보고 표준적 관행을 바로 세우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언론인들이다. 제대로 기준을 세우고 실천해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 법적 판단 기준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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