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한경) 기자들이 김정호 대표이사 사퇴 및 연임 포기를 촉구하는 기수별 성명을 냈다. 편집권 침해와 기자의 사업 투입, 인력보강 없는 편집국 운영, 사장의 폭언 등이 주된 사유다. 창사 이래 처음이라 할 만큼 이례적인 사태에선 그간 누적돼 온 문제가 도를 넘었고 해결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기자들의 좌절감과 분노가 엿보인다.
8일 한경 사내 온·오프라인 노조 게시판 등엔 29‧30·31·32·33·34·35·36·37·38·39·40기 총 12개 기수, 편집기자, 기사심사부 등이 낸 성명이 게시됐다. 2010~2020년 입사한 기자 대다수가 동참한 성명서엔 “김정호 사장의 연임에 반대한다” “초격차 아닌 위기 불러온 3년, 이제는 물러날 때”라며 사장의 연임 포기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포함됐다. 김 대표이사는 2020년 3월 사장으로 선임돼 3년 임기를 거의 채운 상태다.
성명에선 경영진의 편집권 침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사장은 편집권을 과도하게 침해하고 있다. 사장 지시로 1면 기사가 교체되는 일이 적지 않다”(30기), “경영진의 편집권 침해와 국장단의 취재권 침해는 좌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한경을 도와주는 기업’이라는 미명 아래 펜 끝은 무뎌지고, 기사는 삭제됐다”(34기), “‘1면에 매일 사장 사진이 등장해 사장의 인스타그램 같다’…‘위에서 지시했다’는 석연찮은 설명으로 기사가 수정되거나 빠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36기)는 성토가 대표적이다. “17층에서 날아온 호통 한 방에 기사가 갈리고, 지면에 걸릴 수 있게 ‘사장이 좋아하는 기업’이나 ‘사장이 좋아하는 아이템’을 위주로 발제하라는 팁”(37기)이 부서 내에 돈다는 토로까지 나왔다.
편집권 침해의 근원이라 할 각종 협찬과 신사업 등에 기자들이 내몰리며 겪는 자괴감, 인력충원 없는 격무 속 번아웃도 호소됐다. 기자들은 “특정 지면의 기사 4개 가운데 3개가 협찬 기사일 때도 있다…무리한 실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문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킨 ‘경영 참사’”(30기), “취재원에 수시로 사업문의와 협찬공문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한경 기자들은 언젠가부터 기자가 아닌 장사꾼 취급을 받고 있다”(29기), “회사의 행사를 홍보하는 기사들이 대신하고…좋은 기사를 발굴해도 자리가 없어 2단 기사에 그치는 일도 부지기수”(37기)라고 적었다. 또 “신사업이 몰리는 부서에서는 사람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라며 편집국 ‘주력부서’가 많은 인력을 흡수하고 이에 “‘다른 부서를 미워하게 됐다’는 기자의 말을 회사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33기) 한다고 말도 나왔다.
다양한 요구 가운데 ‘사장의 편집권 침해를 막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 주요한 축을 차지한다. 특히 한경의 경우 김정호 사장이 발행‧인쇄‧편집인 등 세 자리를 모두 맡고 있는데, 최소한 편집인은 다른 인사가 담당해야한다는 인식이 중론이다. 국내 주요 신문사 대부분은 편집인을 발행‧인쇄인과 구분해 따로 두고 있고, 조선‧동아일보, 매일‧서울경제 등은 세 역할을 한 사람이 하지만 최소한 사주와 형식적으론 분리돼 있다. 또 다른 요구사항인 ‘편집국 차원 영업활동 축소 및 인력보강’과 관련해선 ‘부서별 사업 담당 직원 배치’, ‘저연차 영업지시 금지’, ‘협찬 기사 총량제’, ‘인력수요 조사 및 확충’ 등이 나왔다.
한경에서 편집국, 회사 전반의 문제를 ‘사장 연임 반대’ 입장까지 포함한 수위로 지적하며 대거 기자들이 성명을 내는 일은 창사 이후 처음이라 할 만큼 이례적이다. 경제지에선 ‘비즈니스 마인드’를 기자들이 체화한 경우가 많고 영업이나 협찬 등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덜한 경우가 일반적이어서다. 이에 이번 사태는 해당 여건에서도 기자들이 수용가능한 범위를 훨씬 넘어선 반복된 문제, 누적된 불만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지난달 말 한경 노보에 담긴 ‘근무여건’, ‘조직몰입도’ 설문결과에선 기자들의 인식이 엿보인다. 175명이 참여한 설문에서 ‘회사에 느끼는 정서적 귀속감이 지난 3년 간 강해졌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는 답이 각각 41.7%, 38.9%였다. ‘회사 생활 만족도’에 대해선 ‘불만족’ 49.7%, ‘매우 불만족’ 29.1%였다. ‘회사에서 가장 시급하게 개선돼야 할 문제’를 물었을 땐 ‘신규채용 부족’ 34.3%, ‘동시다발적인 업무영역 확장’ 33.1% 등이었다. 결국 그간 불만으로 언급된 부분이 계속 조직 내에 쌓여왔지만 해소되지 못했고 결국 분출했다는 방증이다.
특히 성명까지 나온 덴 회사의 ‘불통’이 주요했다. 노조 창립 기념식에서 나온 “직원들은 기득권자”, 디지털라이브부 소속 PD에 대한 “여기는 돈 먹는 하마”란 발언을 비롯해 “기사 한두 개 쓰고 노는 것들”, “생산 능력이 없는 자들” 같은 사장 및 경영진의 폭언이 성명에 적시되며 사과 요구가 나온 터다. 이미 앞선 조사에선 ‘경영진과 직원 간 소통이 잘 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10명 중 9명 이상이 ‘매우 잘 안 된다’(57.7%), ‘잘 안 된다’(35.4%)고 응답한 바 있다.
이번 사태에서도 회사는 그간 행보대로 기자들의 성명 작성 논의가 한창이던 지난 3일에야 ‘편집국장과 대화’를 마련했다. 다음날인 4일 회사는 ‘사장 전달 말씀’을 통해 ‘빠른 시일 내 신입‧경력 기자 채용’, ‘편집국 내 부담 큰 사업 위주로 20% 이상 연내 정리’, ‘신규사업 추진 시 의견수렴 및 속도조절’을 제시했고, ‘국장단이 마련한 편집국 운영 개선 방안’을 통해선 ‘기자들과 소통 강화’, ‘사업부담 최소화’, ‘국내외 출장 편집국에서 비용관리’, ‘연말까지 10명 기자 확충’, ‘실효성 검토 후 일부 뉴스레터 폐지’, ‘부문장 체제 개선’을 약속했지만 상당수 기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한경 한 기자는 “사장의 비전이나 방침이 옳다고 생각한다는 편집국장의 말이 실망스럽긴 했지만 지금 문제는 국장이 아니라 사장”이라며 “사장 전달 말씀에서 최소한 편집인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은 약속할 줄 알았다. 인력충원이나 사업업무 부담 축소 역시 두루뭉술하고 정확한 기한이나 양도 없었던 만큼 기자들이 달가워하긴 어려웠다”고 했다.
여러 기자들이 참여한 만큼 요구 내용과 비판 수위는 다양하지만 이번 사태가 사장 1인의 결단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그간 미흡했던 내부의 총체적인 개선 및 제도화를 바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회사는 누가 사장으로 앉더라도 편집권 침해를 막을 대안, 사업이 기자 본연의 업무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할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36기), “경영진이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편집권에 개입하는 악습을 방지하도록 내부 제도를 정비한다”(38기) 등이 대표적이다. 여러 대기업이 주주로 참여하며 “주주사의 적절한 무관심 속에서 리더가 제왕적 권한을 휘두르는 한경의 불투명한 구조”(31기)가 문제 본질로 지적된 만큼 본업에 충실한 언론사로 거듭나기 위한 후속 조치로서 이는 마땅히 고민돼야 할 부분이다.
한경 사측은 8일 오후 5시30분 기수별 1인 이상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장과의 대화’를 진행할 예정이다. 사측은 이번 사태에 대해 “회사 구성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미흡했던 부분을 점검하고 업무 과중 문제 등을 적극 개선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