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까만 기와집이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입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의 한 카페에서 최순호 지리산담다닮다 대표는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6년 전 숙명처럼 돌아온 그 나지막한 집에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떠났으면 몇 년을 떠나있었던 거야. 하여튼 젊은 시절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 있었으니까.” 중학교를 다니려고 남원 시내를 가니 ‘주천 촌놈’이었고,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니 ‘남원 촌놈’, 대학 공부를 하러 서울에 가선 ‘전주 촌놈’이었던 그는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했다. 서울의 도시적인 색감은 매번 그에게 이질적이었고, 편집국에 있다가 숨도 돌릴 겸 덕수궁을 한 바퀴 돌면 “이 곳은 내가 정주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다.
25년 일한 조선일보에 사표 내고 남원으로
그 때문이었을까. 정년을 한참이나 남겨놓은 지난 2016년, 그는 25년간 일한 조선일보에 사표를 내고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왔다. 남원에서 머문 날보다 서울서 살았던 기간이 더 길었는데도 “고향에 돌아오고 심리적으로 안정”되는 느낌을 받았다니, 그에겐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6년간 그는 지리산 자락에서 그토록 바라던 농사를 짓고 꿀벌을 키우며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최 대표는 “진짜 행복하다”며 “일을 할 때 칼로 짜 맞춘 듯 안 되면 되게 짜증내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런데 서울에 있었을 때보다 마음의 근육은 더 강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사진기자로 일했을 땐 그렇지 않았다. 1991년 최연소로 입사해 최연소 부장을 달았던 그는 “글자를 뺀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매번 독하게 일했다. 목숨을 걸고 비무장지대(DMZ)의 사계절을 담았고, 한국 기자 최초로 탈북하는 북한 주민의 모습을 촬영했다. 민간인 신분으로 평양을 두 번 왕복하는가 하면 서울 서초구 우면산 산사태 당시 기지를 발휘해 드론 촬영을 감행, ‘서울을 할퀸’ 모습을 조선일보 1면에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지난 2004년엔 의료 사각지대로 내몰린 외국인 노동자를 취재하다 김해성 목사의 부탁을 받고 회사를 설득해 외국인 노동자 전용의원을 설립한 적도 있다. “한 가지에 필이 꽂히면 하는” 그의 성격은 그렇게 일에서 어김없이 발휘됐다.
방통대 농학과에서 공부하며 귀농 준비
그러나 사진부장이 되고, 새벽 1시를 넘겨 퇴근해 오전 8시30분엔 출근해야 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자 독한 그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점심과 저녁식사 자리는 물론 시내판을 기다리며 술자리가 이어지는데, 그런 생활을 3년 반 했더니 “죽을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때부터 그는 인생 이모작을 꿈꿨다. 나이 50을 넘으면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마음으로 한국방송통신대 농학과에 들어갔고, ‘중농회’ 스터디에서 밤 10시, 11시까지 즐겁게 공부했다. 버섯 연구소에서 6개월짜리 과정을 들으며 표고버섯을 수확하고, 통나무 집짓기 학교도 다니면서 착실히 귀농 준비를 했다.
고향에 돌아왔을 땐 구체적으로 어떤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첫 해는 들깨농사를 지어 생 들기름을 짰는데, 이듬해에 농사를 돕던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전신이 마비가 되셔서 재활치료를 위해 1년 6개월을 전북대병원에 계셨어요. 저는 농사를 벌려놨으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전주로 가 어머니 옆 침대에서 자는 생활을 하고 그랬습니다. 근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시기 내가 직장 다닌다고 서울에서 살고 있었으면 누가 이렇게 했겠나, 힘들지만 나름 굉장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다행히 워낙 의지가 강하신 분이라 지금은 전동차도 직접 몰고 아침에 아들 밥도 차려주십니다.”
삼남매 키운 부모 가업 이어 양봉 시작
다만 어머니가 없는 상태서 혼자 들깨농사를 짓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고민하는 그에게 지인이 추천한 것이 양봉이었다. 양봉은 그의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일이었고, 이후 어머니가 이어받아 삼남매를 키운 가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최 대표는 운명처럼 양봉을 시작했다. 그는 30통에서 시작해 한때 120통까지 벌통을 늘렸고 천연꿀뿐만 아니라 로열젤리, 프로폴리스 등의 부산물도 생산하며 꿀벌을 키웠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어깨가 말썽이었다. 20년 넘게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다녔기 때문일까, 숟가락도 들지 못할 정도로 어깨 인대가 망가져 그는 또 다시 양봉을 놓게 됐다. 때마침 엉겁결에 맡게 된 주천면 발전협의회의 총무 자리는 그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어깨가 아파 집에서 쉬고 있는데 면사무소에서 문자가 왔어요. 6.25 때 학살당한 고기리 주민들을 위해 위령비를 설립하는데 그 첫 번째 회의를 하니 나와 달라고. 아니, 그게 72년이나 됐는데 아직까지 위령비도 없다니, 이게 말이 되냐 회의를 갔죠. 갔더니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그게 어떤 사건인지 몰라, 참 황당했어요.” 당시 면사무소에선 그에게 20페이지짜리 관련 자료집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는데, 조사를 하다 보니 단순히 자료집을 만들 게 아니었다. 국방부 자료까지 들여다보며 “갱도를 깊게 파고 들어간” 그는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가재 상흔' 발간 이어 사비 들여 다큐멘터리 작업
그렇게 지난해 10월 본격적으로 시작된 집필은 “밤잠도 안자고, 궁둥이가 문드러질 때까지” 최 대표가 노력한 끝에 올해 6월, 책 <가재 상흔>으로 마침표를 맺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뒤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촘촘히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책이 나오자 욕심이 생겼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고 싶어진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사비를 들여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현재 마을 어르신 10명을 인터뷰하며 채록을 완료했고 드론 샷도 모두 촬영한 상태다.
“SBS 영상감독이었던 김우경 선배가 와서 2주 동안 촬영을 도와줬어요. 영상은 처음인데 돈도 많이 들고 사람도 많이 필요하고, 도와주는 사람들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 하고. 피곤하고 힘들고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진 게 아닌가 걱정도 들죠. 하지만 이 나이에 가슴 떨리는 일을 하는 거잖아요. 맨날 힘들다고 그러는데 마음 한 구석에선 이 일이 가슴 설레는 긴장감을 준 것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는 어느 정도 편집 과정이 끝나면 지상파 방송국 등에 알리고 본격적인 납품을 준비할 계획이다. 영화도, 지역 방송사도 고려하지 않고, 만약 지상파 방영이 좌절되면 유튜브로 내보낸다고 했다. 어머니께 드린 책에도 저자 사인을 하지 않을 만큼 자신이 돋보이기보다 사건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는 마음에서다.
다만 최 대표가 양봉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다큐 제작이 완료되고 어느 정도 어깨가 회복되면 그는 내년부터 다시 제대로 꿀벌을 키울 계획이다. 양봉을 시작하기 전, 항공 마일리지를 털어 양봉의 성지 슬로베니아에 15일간 팜투어를 다녀왔던 그는 영감을 얻어 지리산 자락에 양봉과 관련한 ‘힐링 캠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아버님 산소가 있는 산 1만2000평을 샀어요. 슬로베니아가 양봉을 관광 상품화시킨 것처럼 지리산이 갖고 있는 특색을 살려 사람들이 와서 놀 수 있도록 토대를 차곡차곡 만들어 갈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