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분을 위해 비누에 손을 씻고 / 지나가는 구름에 손을 넣어 또 한 번 씻고 // 하얀 입술들이 전해주는 은밀한 이야기가 농익어 갈 때/ 어디선가 코트 깃을 세운 노신사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자 혼비백산 흩어지는 어떤 조각들”(후략)
위성욱 중앙일보·JTBC 부산총국장의 시 ‘수돗가의 구름’ 일부다. 시 전문 계간지 ‘시와반시’ 2022 상반기 신인상에 ‘오래된 습관’, ‘놋뱀의 정원’, ‘턴테이블 연대기B’, ‘홀리데이’ 등 5편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며 그는 최근 시인으로 등단했다. ‘지천명’이 된 1972년생 기자에겐 현실과 꿈이 포개진 순간이었다. 지난 9일 본보와 통화에서 그는 “1월 말 주말에 아침을 먹다가 문자로 통보를 받았다. 현실감이 없어서 집사람에게 ‘엇, 당선문자가 왔네’하며 어리둥절했다(웃음)”면서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두려움이 앞선다”고 소감을 전했다.
대학시절 시를 썼다. 손택수·최갑수 시인, 이영도·구경미 작가 등 걸출한 문인을 다수 배출한 경남대 국문과 동문들과 “글을 쓰고 문학을 말하는 문화”였다. 몇 차례 투고도 했지만 여러 사정 탓에 졸업과 함께 시를 그만뒀다. “다들 등단 후 지역을 떠나며 홀로 남게 됐고 누군가 시를 쓰라고 하지 않으니 스스로 도태됐다. 큰 일 터지면 몇 개월이 가는 녹록지 않은 일을 하다보니 어느새 40대 중후반이 돼 있었다.”
하지만 “가보지 않은 것에 대한 미련과 후회, 그런 것이 만들어 낸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역에 내려온 학교 선배 성윤석 시인의 ‘옛날에 잘 썼는데 왜 안 쓰냐’는 말이 계기가 됐다. 20년의 공백은 컸다. “시적인 상황이 와서 불이 붙으려면 몸이 바짝 말라 있어야 하는데 일에 파묻혀선 영감이 와도 발아가 쉽지 않다.” 그렇게 첫 1년은 “안 읽고 못 읽은 시를 찾아 읽으며” 시풍을 익혔다. 2~3년 간 매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1~2시까지, “틈틈이 떠오른 영감을 수첩에 메모했고 그걸 모아” 시를 쓰고 읽는 작업을 했다. “시집을 내 등단하려 했는데 가까운 목표가 없다보니 안 하게 됐다. 죽든살든 일단 등단을 하자 해서 일주일 겨울휴가를 내 작업을 했다. 투고까지 보름이 남았는데 시를 모아보니 도저히 용납이 안 돼서 이후 2주 간 밤에 다시 썼다. 어느 날 몸이 민감해지는 순간이 온 거 같은데 2~3시간 만에 등단작 중 3편을 썼고, 다음날 봐도 흡족했다.”
시가 평생하고픈 일이었다면 기자는 꿈꾸던 직업이었다. 마산MBC에서 작가로 지냈고 2000년대 초 경남도민일보에 기자로 입사했다. CJ경남방송을 거쳐 2011년 중앙일보로 직장을 옮겼다. 2014년엔 ‘자신의 나이보다 전과가 많은 아이들’ 50여명을 인터뷰하고 내놓은 대형기획 <전과 5범 이상 소년범 1만명>으로 ‘이달의 기자상’ ‘인권보도상’을 수상했고, 관련 세미나 발제자로 서울고검에서 강의도 했다. “연달아 터진 사건에 힘들었는데 ‘저는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란 소년의 말에 마음을 다잡은 기억이 난다.(중략) 디지털 시대 기사 수명이 줄어들지 않나. 무용한 것만이 줄 수 있는,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는 것에 대한 갈급한 결핍이 있는 듯하다. 딸이 저더러 형사반장 얼굴이라던데 실제 날카로워 보였다. 시를 쓰는 얼굴이 제가 바라는 늙은 모습에 더 가깝다. 저를 정화하는 분출구인 셈이다.”
꿈을 계속 간직할 수 있는 재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입사 때 “퓰리처 상을 타고 싶다”고 해서 가끔 직장 동료들에게 놀림 받는다. 그는 “허무맹랑해도 꿈이 있으면 근처엔 가지 않겠냐”고 생각한다. 시인으로선 “납득할 수 있는 시 50~60편이 담긴 시집을, 원하는 출판사에서 내는 게 꿈”이다. 그리고 어떤 꿈은 이어진다. 딸 아이가 대학교 문창과에 재학 중이다. “등단 계기 중 하나다. 언제부터 ‘이거 읽어봐라’ 해도 제 말이 안 먹혀서 먼저 등단하려고 했다.(웃음) 최종적으론 기자 경험으로 시를 쓰고 싶은데 아직은 내공이 부족하다. 퇴직, 죽음 후엔 시,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미약한 등단 시인이지만 끝까지 가보려 하는데 쉽진 않다. 당장 써놓은 시가 떨어져 여름휴가나 연차를 이용해 써야 한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