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 이후 가장 널리 회자되는 말 중에 하나가 “판사는 미뤄 조진다”는 소설가 정을병의 문구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처럼 이 말에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사례도 드물다.
이 소송은 2012년 대법원이 피해자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한 뒤 고등법원이 피해자 승소 판결, 2013년 대법원으로 올라왔지만 5년 동안 계류됐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외교부의 민원을 반영하는 대신 판사들의 해외공관 파견을 늘리는 식으로 재판 거래를 한 정황이 드러났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관련 보고를 받고 철저히 대응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를 이행하기 위해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두 차례 공관 회의를 소집해 정부 고위 관계자들과 논의를 했다. 그 결과 소송은 지연됐고 그 사이 영문도 모른 채 선고를 기다리던 피해자 9명 중 7명은 사망했다.
취재 과정이 쉽지 않았다. 밤낮 없이 취재원을 만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벽에 부딪혔다. 그 벽을 넘어선 끝에 법원행정처가 2013년 9월 작성한 ‘강제노동자 판결 관련-외교부와의 관계(대외비)’ 문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도 이후 변화는 시작됐다. 대법원은 7월 말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최고 법률심인 전원합의체로 넘겨 심리를 시작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잘못된 길을 걸었던 법원행정처 조직을 폐지하기로 했다.
본보 보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언론의 보도가 없었다면 이 사건은 지금처럼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부터 시작됐던 이번 사건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커졌고 이 과정에서 여러 언론인들의 땀이 배어있다.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포함한 당시 고위 관계자들에 대한 검찰 조사도 남아 있다. 피해자 중 최고령인 98세 이춘식 옹은 재판을 시작한 지 13년째 아직도 매일 선고 결과를 기다린다고 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끝까지 눈을 뜨고 있어야 되는 이유다.
좋은 보도를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이명건 사회부장과 정원수 팀장을 비롯한 법조팀 선후배님들과 법조계 관계자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