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정책 결정의 슬픈 자화상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전격적인 기습작전에 가깝다.
사전 예고나 설득같은 것은 사치일 뿐이다. 은밀히 결정해 공표하면 그만이다. 반대나 불만의 목소리에 어떻게 대응할 지 세밀한 계획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국가를 믿고 따라오라는 식의 강변만 할 뿐이다.
다름아닌 우리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결정 과정의 슬픈 자화상이다.


멀리갈 것도 없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논란만 봐도 명백하다. 외교안보 주무부처인 외교부와 국방부, 통일부가 사드 배치 결정 과정에서 벌인 일련의 행태를 보라. 지난달 8일 사드 배치 결정을 미군과 공동 발표하더니 불과 닷새만에 경북 성주군에 아무런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확정’ 공표했다. 이 사안 자체가 엄청난 사회 갈등을 촉발할 수 있는 만큼 사전에 국민여론을 살피고 지역주민들을 설득하고, 정치권의 양해를 얻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깡그리 무시됐다.


일본 정부가 사드의 핵심인 ‘X-밴드 레이더’를 2014년 교토부 교탄고시에 설치할 때와 비교하면 거의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다. 미국과 일본은 1년간의 협의를 거쳐 2013년 2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이 레이더의 배치에 합의했다. 하지만 곧바로 확정 발표하지 않고 일본 방위성 차관이 교탄고시를 방문해 공식적으로 배치 수락을 요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 차례의 환경조사가 실시됐고, 15회의 주민설명회가 열렸다. 이런 공론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지역의회가 레이더 배치에 찬성하면서 같은 해 9월19일 공식 배치가 결정됐다. 미·일 합의 이후 약 7개월간의 정교한 여론 설득 작업을 거친 것이다.


일본 아베 정부는 사드 레이더 배치를 발표하기 위해선 주민설득과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였는데 우리 정부는 그런 과정을 생략한 채 기습작전을 펴도 괜찮다고 생각한 셈이다.


현 정부가 첨예한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외교안보 사안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2월11일 개성공단을 전격 폐쇄했을 때도 비슷한 패턴이다. 통일부는 공단 폐쇄 조치를 내리기 전에 우리 업체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준비를 할 수 있었는데도 단 하루의 여유도 주지 않고 공단 패쇄부터 발표하는 바람에 124개 입주기업과 6000여개 관련기업 10만여 근로자의 생계가 하루아침에 막막해졌다.


지난해 12월28일 발표된 한·일 위안부 합의는 더욱 충격적이다. 위안부 문제는 가해자(일본)와 피해자(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명백한 사안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조치를 피해자 할머니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해결의 핵심 관건이었다. 따라서 협상과정에서 일본이 제안한 조치들을 할머니들에게 충분히 사전 설명하고 양해를 얻어서 합의하든지 아니면 결렬을 선언하든지 해야 했다. 그런데도 외교부는 협상내용을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일본 정부와 덜컥 합의를 해버리고는 뒤늦게 할머니들에게 이게 최선의 합의라며 수용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제대로 된 선진국 가운데 주요 정책 결정을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정책이건 국민이나 주민의 100% 동의를 얻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최대한의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은 한 후에 발표하는 게 민주국가의 정책 결정 프로세스다. 하지만 우리 외교부와 국방부, 통일부의 정책 매뉴얼에는 은밀한 결정과 신속한 발표만 있을 뿐 이런 절차적 정당성을 얻는 과정은 생략돼 있거나 아니면 부록쯤으로 기술돼 있는 것 같다. 외교안보 부처의 고위 관료들도 교육부의 누구처럼 혹시 국민을 주권자가 아니라 ‘개·돼지’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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