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나라'의 한국 금융산업

[스페셜리스트 | 금융]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삼성그룹이 지난해 화학·방위 관련 4개 계열사를 한화그룹에 넘긴 데 이어 최근 롯데그룹에 남은 화학부문마저 팔기로 했다. 곧이어 CJ그룹이 케이블TV 1위인 CJ헬로비전을 SK텔레콤에 매각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사업 구조조정을 위한 대기업 간 ‘자율 빅딜’이란 점에서 경제·산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삼성과 CJ의 파격 행보는 절박함의 발로다.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다. 롯데케미칼에 팔리는 삼성정밀화학 노사가 “글로벌 초일류 기업 도약을 위해 롯데케미칼의 지분 인수를 적극 지지하고 환영한다”는 이례적인 성명을 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히는 대목이다.


한국 금융사에는 이런 자발적 빅딜을 찾아볼 수 없다. 글로벌 시장에서 초라한 규모와 경쟁력을 갖고 있음에도 말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은 올해 한국 금융부문의 경쟁력을 87위로 평가했다. 필리핀(48위), 스리랑카(51위), 나이지리아(79위), 베트남(84위) 보다도 낮은 순위다. 영국 금융전문지 더 뱅커가 선정한 ‘2015 글로벌 1000대 은행 순위’에서 50위권에 든 국내 은행은 단 한곳도 없는 실정이다.


인·허가(라이선스)를 가진 금융사들이 예대마진에 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은 대표적인 라이선스 사업이자 내수에 머물러 있는 산업이다. 국내 은행의 인·허가는 1992년 평화은행이 마지막이었다. 아시아 금융 허브를 내걸고 글로벌화를 추진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제자리걸음에 그치고 있다. ‘혁신’은 구호일 뿐이다. 어느 은행에서도 차별화된 상품이나 경쟁력을 찾아보기 어렵다. 상품과 서비스가 똑같다 보니 합병을 해봐야 비용 절감 외엔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금융사들은 ‘금산 분리’라는 우산 아래에 ‘라이선스’란 갑옷을 입고 수십년 간 경쟁력 없이 산업 위에 군림해온 것도 사실이다.


위기는 금융권 밖에서 소리 없이 엄습하고 있다. 핀테크, 인터넷은행, 크라우드 펀딩, P2P(Peer to Peer) 대출 등이 대표적이다. 맥킨지의 글로벌 은행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핀테크 확산으로 은행의 소비자금융 수익은 10년 뒤 60%, 매출은 40%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은행에 가지 않고도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전문은행도 내년 도입될 예정이다. 평화은행 이후 24년 만에 은행 시장에 신규 진입자가 탄생한다.


진화론에는 ‘붉은 여왕 가설(Red Queen Hypothesis)’이란 게 있다. 붉은 여왕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유명한 작가 루이스 캐럴의 후속 작품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소설 속에서 앨리스가 “빨리 달렸는데도 왜 제자리냐”고 묻자 붉은 여왕이 말한다. “여기선 제자리에 있고 싶으면 죽어라고 뛰어야 한다.” 붉은 여왕의 나라에선 주변 세계가 함께 움직이는 까닭에 힘껏 뛰어야만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주변 환경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생물이 진화를 하더라도 속도가 늦으면 적자생존에 뒤처진다는 게 이 가설의 시사점이다. 환경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망하고 이기려면 더 빨리 진화해야 한다는 게 기업에 주는 메시지다.


급변하는 금융 패러다임은 또 다른 위기를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금융 산업에 절박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주전자 속 개구리’처럼 한가롭게 유영하고 있을 뿐이다. 금융사들의 위기감 부재가 가장 큰 위기란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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